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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Nov 02. 2017

나의 나무

 12월 중순쯤 하와이에 왔다. christmas season. 미국은 크리스마스가 정말 중요한 연휴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big holiday에 아무도 집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main land(여기서는 미국 본토를 이렇게 부른다.)에 사는 자식들을 하와이로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느긋하게 여유를 즐겼다. 나온 방은 없고 그나마 집을 보러 가면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지나치게 낡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20~30년 된 아파트면 재개발 대상인데 여기에서는 19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가 매우 새 집 축에 속한다.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집들이 수두룩했다. 돈은 자꾸 줄어들고 속은 타들어 갔다. 조급한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덜컥, 집을 계약했다. 나무 때문이었다. 창문 밖으로 바로 보이는 이 나무 때문에. 1970년대에 지어진 나름 새 집이었지만 찬장은 너무 오래됐고 화장실 수도꼭지는 마치 십 년 넘게 아무도 안 쓴 것처럼 빛이 바랜 허름한 집. 깨끗한 도배지와 새로운 장판, 현관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켜지는 불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의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집들과 비교하자면 너무 형편없는 집이었다. 그런데 월세는 말도 안 되게 비싼 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저 나무 하나만 보고 집을 계약했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나는 가끔씩 충동적으로 허무맹랑한 짓을 하기도 한다. 아니, 자주 한다.

 


내 딴엔 이유가 있었다. 나무의 한결같음 때문에. 항상 같은 곳에 있는 나무를 보면 왠지 모르게 긴장이 풀린다. 


'절대'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 나무를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문 밖에 서 있는 나무가 제일 먼저 보인다. 비가 오는 날에도 나무는 묵묵히 비를 맞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도 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같은 곳에 서 있다. 



힘든 때가 있었다. 내가 지고 버텨야 할 삶의 무게가 말도 안 되게 버거워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던 때. 바람처럼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게 허공으로 사라지고 싶은 때가 있었다. 온 세상과 함께 내 표정은 생기 하나 없는 무채색이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 나와 함께 펑펑 울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때, 사람들의 위로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옆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을 때.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만 간신히 잡은 채 버티고 있는 심정일 때 든든한 손을 뻗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떠났다. 기대고 싶어 하는 나를 자꾸 밀쳐냈다. 계속 거꾸러지기만 하는 나를 사람들은 더 이상 일으켜 주지 않았다. 매정하게 내게 등을 돌렸다. 후련하다는 듯, 미련 없이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빠르게 각자의 길로 떠났다. 



세상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인색하다. 너그럽지 못하다. 특히 혼자 서 있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세상의 냉혹함에 관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인생의 고비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떤 순간이든 나는 혼자서 든든히 뿌리를 박고 서 있어야 했다. 휘청이지 않고 씩씩하게 버텼어야 했다, 나무처럼. 송두리째 뽑혀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생명을 잃는 일이다. 뿌리 뽑힌 나무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누가 와서 물을 주든, 비료를 주든, 받침대를 세워줄 수 있음을 왜 몰랐을까. 나는 힘들다고 마냥 징징거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통째로 업히려고 했다. 



이제는 안다. 나는 나무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 내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당당히 마주하는 사람. 함부로 울고 주저앉지 않는 뚝심 있는 사람. 언제나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한결같이 내 자리를 지키는 사람. 작은 일에 성내거나 낙심하지 않는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불평하는 대신 눈부시게 반짝이는 초록잎을 틔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결국엔,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힘들어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 지금 잠시 쉴 곳을 내어주면 곧 힘을 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그늘을 내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지금까지 내 옆에 머물러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태양 아래 눈사람처럼 힘없이 마냥  녹아내리기만 하던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힘껏 안아준 가족들. 아픈 상처에 새 살이 돋을 때까지 언제고, 몇 번이고 나를 도닥여주며 함께 울고 웃어 주었던 친구들, 인생의 선후배들.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다. 당신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아직은 여린 잎에 불과하지만 나도 열심히 자라겠다. 굵고 탄탄한 몸통을 만들어 그대가 힘들 때 언제고 와서 기대고 갈 수 있는 당신의 나무가 되어 주겠다.


당신은 푸른, 나의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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