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UANU PALI LOOKOUT. 바람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주차를 하고, 저만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망대에 다다르면, 거짓말 같은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탁 트인 전망과 무성한 숲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숲 속에 난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문득 요정들의 마을을 발견한 것 같은 충격이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살 것 같지 않은, 왠지 호빗족이 살고 있을 것 같은, 마법 같은 풍경.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환상적인 경치를 사진에 담아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역부족이다. 웅장하면서도 부드럽고,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포근한 편안함을 주면서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 묘한 느낌이 아무래도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다. 아쉽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곳에 가든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고 또 누른다. 매번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고민에 빠진다. 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어야 할지, 아니면 모든 것을 눈에 담겠다는 굳은 의지로 조용히 경치를 감상해야 할지.
사진은 언제든 그 날의 추억을 생생하고 선명하게 되살린다. 남는 건 사진이라고 했나. 이제는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앳됐던 내 얼굴도, 지금보다 훨씬 홀쭉하고 젊은 부모님들의 옛 모습도, 많은 시간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여행지도 모두 사진 속에 고스란히 박제돼 있다. 흐리멍덩한 내 기억력보다는 사진이 훨씬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진을 찍다 보면 부산스러워진다. 풍경과 내 눈이 직접 만나지 못하고 카메라라는 매개체로 방해를 받는다. 가만히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완벽하게 눈 앞의 현실을 누리는, 잠깐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래, 눈에 온전히 담을 거야. 카메라를 손에서 내린다. 그러면 우습게도, 이 날이 추억에서 사라진다. 아무래도 내 기억력은 사진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훗날 사진이 있어야 이 날 내가 이 친구와 이렇게 웃고 있었구나, 되새길 수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과거는 주로 사진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진이 많으면 많을수록 과거는 더욱 풍성해진다. 어쩌지. 사진을 찍어야 하나, 집중하고 내 눈에 직접 담아야 하나, 언제나 고민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지금의 감정과 마음의 표정을 꼭꼭 기억해 보려고. 내가 본 것들을 누구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싶어서. 고 박경리 작가에게 한 기자가, 어떻게 '토지'라는 대작을 쓰게 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는 나는 그저 할 말이 너무 많았을 뿐이라고 답했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글을 쓴다. 나의 글에 누군가는 공감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도 당신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런 심정이었다, 나의 시간은 이렇게 흘렀다 등등,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는 믿음으로.
글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진을 정리하고 고르는 일,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내고 개요를 짜고, 텅 빈 모니터를 한 자 한 자 꾸역꾸역 채우는 일. 아기를 키우며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글 쓸 시간을 내는 일. 읽어주는 독자가 없어 헛헛한 마음을 견디는 일. 묵묵히 이어가는 모든 과정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글을 쓴다. 언젠가는 내 상상처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날들이 올 것 같아서. 그리고 오늘의 나를 기억하려고. 이 모든 것들이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가도, 인생은 결국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는 일이라 되뇌면서.
그래서 오늘도 졸린 눈을 부비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