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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Oct 01. 2018

빈둥거리다 vs 쉬다


매직 아일랜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과 사람들. 해변에는 말로만 듣던, 값비싸 보이는 요트들이 줄지어 서 있다. 혼자, 혹은 일행과 함께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낚시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관광을 온 건지, 이 곳에서 살고 있는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추억을 남기고자 하는 친구들도 있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바닷가를 바라보며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취향대로 '쉬고' 있었다. 



나는 언제 쉬었더라. 


쉬는 시간을 언제 가져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는 그저 숨 가쁘고 바빴다. 산책을 했던 것? 저녁 식사 후 산책은 쉼이라기보다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몸부림으로 기억된다. 현실을 잊기 위한 도피였고. 친구들과의 만남? 친구들을 만나서는 주로 쇼핑을 했는데. 서로의 옷을 골라주고 이 정도면 사도 될지 안 될지를 솔직히 말하라며. 친구들과의 만남은 쇼핑과 수다로 채워져 재미있기는 했지만 휴식을 취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여자들의 쇼핑은 꽤 힘든 노동이니까. 



대신, 빈둥거린 적은 많다. 주말 아침에는 어김없이 늘어지게 잠을 자곤 했으니까. 눈이 떠져도 다시 자고, 엄마가 그만 좀 자고 일어나라는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도 모르는 척 다시 잠을 청했다. 배가 고픈 것이 느껴져도 참고 자고, 너무 많이 자 허리가 아픈 것 같아도 또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와도 지금 일어날 수는 없다며 강한 의지로 다시 한번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토요일 오전은 어김없이 비몽사몽, 멍하게 흘러갔다. 



그나마 늦잠을 자는 게 쉬는 것이었을까. 갑자기 빈둥거리는 것과 쉬는 것의 차이가 궁금해졌다.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빈둥거리다.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자꾸 게으름을 피우며 놀기만 하다. 


쉬다.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 




빈둥거린다를 정의하는 말 중 '게으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 빈둥거린다는 단어에는 할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를 차일피일 미루며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며 시간을 허비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토요일 오전 나의 늦잠은 빈둥거림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주말에는 영어 공부도 하고 방 청소도 하고 운동도 해야 했다. 강아지도 오랜만에 산책을 시켜야 했고 가끔씩 있는 지인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해야 했다. 해야 할 일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도 나는 모르는 척, 아니, 해야 할 모든 일들이 귀찮고 힘들어 주야장천 잠만 잤다. 잠을 자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빨리 일어나 할 일을 해야지 왜 이러고 있냐는 죄책감이 콕콕 나를 찔렀다. 



반면 완전한 쉼에는 죄책감이 없다. 싱크대에 가득 찬, 설거지를 기다리고 있는 그릇들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오늘의 할 일' 목록도 없다. 그저 편안히 앉아 몸속에 쌓인 피로를 풀어내면 된다. 종종걸음 치느라 퉁퉁 부은 발을 가라앉히고 하루 종일 무언가를 들여다보느라 벌겋게 충혈된 눈도 잠시 감는다. 전화벨 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로 지쳤던 귀에게는 힘들었던 소음 대신 고요를 선물한다. 무언가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면 가만히 마음을 어르고 달래 준다.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이제 다 지나갔다고. 그러다 보면 다시 새 살이 돋는다. 힘과 에너지가 몸속에 차오른다. 



작정하고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발과 눈의 휴식이나 마음의 생채기 따위야. 그런 것들보다는 '오늘의 할 일' 목록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그 목록은 언제나 빼곡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쉰다는 것에는 언제나 뒤처지거나 게으르다는 죄책감이 줄줄이 뒤따랐다. 아닌데. 게으름과 죄책감은 빈둥거림에 따르는 것인데. 나는 이렇게나 쉬운 정의를 왜 뒤바꿔 생각해 그동안 한 시도 쉬지를 못했을까.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웃고 떠들고 편안히 잘 쉬었던 행복한 시간들을. 자고 싶은  만큼 한없이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개운함과 가뿐함.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을 때, 오늘은 해방이구나,라고 느껴지던 여유. 엄마가 차려주는 늦은 아침을 당당하게 먹을 수 있었던 축복, 사랑. 순간순간 달콤하고 편안한 쉼이 많았는데 쉰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나를 몰아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모든 쉼이 빈둥거림이었다고, 나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던 거라고
내 기억이 나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잘 기억해야겠다. 지금의 풍경, 시선, 사람들을.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을 뺐다.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며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었다. 각자의 모습대로 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바다를 질리도록 바라봤고 따뜻한 바람을 가슴속에 가득 담았다. 이유 없이 괜스레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해졌고 발걸음은 통통 가벼워졌다. 오늘을 기억에 담아 둔다. 훗날 쉰 적이 없었다며, 매일 바쁘고 힘들기만 했다고 스스로 나를 짓누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그러지 말아야지. 나의 하루하루를 우울하고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 잘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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