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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Fool in the rain

애증의 한라산을 오르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된 숙소 주인장과의 대화는 새벽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 되었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려했던 나홀로여행은 첫 날부터 뜻밖의 만남으로 인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무 계획을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음악 좋아하는 분을 만나게 되서 너무 좋은데요. 내일은 원래 동부쪽 해안가로 갈까했었는데.. 그냥 여기 머물고 싶네요. 혹시 내일도 하루 더 묶을 수 있을까요?"


첫 날 숙소만 Airbnb로 겨우 예약한 상태여서 둘째날인 토요일은 숙소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갈지 여행 루트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페 무대 위의 통기타들. 대부분 뮬 사이트 중고장터에서 구입한 중고 악기들이라고 한다.


"음. 잠시만요... 내일은 주말이기도하고 제 지인들이 놀러오기로 해서 빈방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 예약 상황을 확인해 볼께요."


예약 상황이 정리된 현황판을 살펴 보던 주인장은 이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뜻밖의 여행. 뜻밖의 만남. 뜻밖의 행운...


"내일 작은 방들은 다 예약이 끝났는데. 다행히 4인용 큰 방이 하나 비어 있네요. 그냥 작은 방 비용으로 편하게 쓰세요. "

"아. 그래도 될까요.."


정말 쿨 하시다. 예기치않은 사건들이 연속되자 마구 즐거워진다. 사색하며 심심하게 혼자 이곳 더곳 돌아다니리라던 예상은 우연히 이 곳 숙소 '어쿠스틱홈즈'에 묶게되면서 열기 뜨거운 락페스티벌의 현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방에도 통기타가 있다. 아름답다. 기타는 인테리어 소품의 역할도 하거늘... 왜 우리집에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걸까.

내일 모이기로 했다는 지인분들은 예전에 주인장과 같이 음악을 했었다고 한다. 앨범 작업을 위해 주말동안 제주도에서 모여서 이 곳 숙소에서 합주를 하기로 했단다. 어떤 분들일까.


"내일 저녁에 시간되면 같이 잼(*jam - 대략의 코드 진행만 정해놓고 즉흥적으로 합주하는 것)이나 하시죠. 하하"


이런.. 제주도에 와서 모르는 사람들과 합주라니. 상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이튿날. 애증의 한라산을 오르다.


밤사이 비가 내렸다. 데크 방부목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시 잠에서 깨었다가 이내다시 잠들었다.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 자연의 소리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먼훗날 제주도에서 이런 자연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사는 모습을 그려 본다.


새벽 7시에 눈을 떴다. 지난 밤 내렸던 비는 그쳤다. 그래. 오늘은 한라산을 올라보자. 눈 뜨고 5분만에 오늘 여정이 정해졌다. 여러번 제주도를 왔었지만 가족들과 함께 왔을 때는 주로 해안가나 주요 관광지를 다녔기에 한라산은 한 번도 오르지 못했었다. 이번에야 말로 절호의 기회.


주말에는 등산객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어 간단히 짐만 챙기고 최대한 빨리 길을 나섰다. 운 좋게 이 곳 애월읍에서 하루를 더 묶게 되었다. 오늘은 큰 방으로 옮겨야해서 아침에 짐을 다 빼서 차에 실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체크아웃을 하지 못 한채 렌트카의 시동을 걸었다.


30여분을 달려 해발 1100m에 위치한 영실 탐방로 부근에 이르자 안개 자욱한 곡선도로가 이어진다. 드디어 도착한 주차장. 예상과 달리 주차장이 텅 비어있다.


음. 너무 일찍 왔나?


사실 이 때라도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준비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중에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영실등산로 입구 주차장. 주말 아침인데도 한산한 주차장. 이때 뭔가 이상한 기운을 알아챘어야했다.

출퇴근 복장으로 산행에 오르다


아침 8시. 등산로 입구 휴게소에서 비상식량으로 초코파이 2뭉치와 생수 한 통을 사들고 산행 출발. 아웃도어 브랜드로 중무장한 등산객들이 드문 드문 보일뿐 생각보다 한산하다.



오르는 길에 시냇물이 흐른다. 저 물이 흐르고 흐르다가 이 곳 땅에 스며들어 쿠팡맨이 집 앞까지 배송해주는 삼다수가 되겠지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해본다. 20여분을 오르자 갑자기 눈 앞에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펼쳐진다. 여기가 영실 등산로에서 만나게 된다는 난코스인가보다. 이 등산 루트가 가장 수월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다른 코스는 얼마나 험하단 말인가.


헉헉. 계단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숨은 차오른다. 등산로 중간에 마련된 간이 전망대에서 잠깐 가방을 풀고 초코파이 하나와 생수를 마신다. 달콤한 휴식도 잠깐.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게 뭐야 하는 사이에 굵어진 빗줄기. 위를 올려다보니 정상 부분은 어느새 구름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아무래도 엿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엿됐다.


fool in the rain....


대략 40여분 정도 올라온거 같은데.. 여기는 어디며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걸까.


아웃도어로 중무장한 등산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입고 배낭을 방수커버로 덮는다. 그리고는 늘상 있는 일인듯 다시 우의차림으로 유유히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낭패다. 아무 생각없이 동네 산책하듯이 한라산을 오른 나는 무방비상태였다. 우의는 커녕 야구모자에 면바지에 테니스화. 노트북용 백팩을 들고 왔으니. 물론 배낭에 노트북이 들어있었던건 아니었지만. 나혼자 출퇴근 복장으로 산중턱에서 망연자실해있다. 옷이며 가방이며 제주의 빗방울을 물먹는하마인 듯 있는 그대로 머금기 시작했다.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작년에 회사에서 단체로 맞춘 윈드자켓을 가져온 것이 천만 다행이다. 더울까봐 반바지로 입고 나섰다가 긴 면바지로 바꿔 입은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나 스스로 위안꺼리를 애써 찾아 본다. 야구모자가 머리에 빗방울이 바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산을 우습게 보면 안되요."


얼마나 더 올랐을까. 그렇게 꿋꿋이 비내리는 한라산을 오르는데 아웃도어로 중무장한 아주머니 한 분이 나에게 걱정스레 건네준 말이다.


위로 올라갈 수록 추워지고 비에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이 내려갈 거라고 알려 주셨다. 40분 정도 더 가면 정상 대피소가 있으니 그 곳에서 따뜻한 컵라면 먹고 몸을 녹이라고.


그러고 보니 명색이 한라산인데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적어도 출발 전에 날씨는 체크했었어야 했다. 겁 없이 덤볐구나. 뒤늦게 후회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비에 비 맞으며.. 이런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몰랐었어.. 아웃도어 제품들

니가 그렇게 유용한건지

울긋불긋한 방수 자켓 방수 신발

이해할께 너의 그 가격들

넌 아마 니 주인을 편하게 해줄꺼야...♪"


또 이런 노래도....


"나 혼자 런닝화 신고

나 혼자 야구모자를 쓰고

나 혼자 면바지 입고

나 혼자 노트북 배낭 메고 ㅜㅜ

비바람에 젖고 젖어 후회해도 소용없네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


가파른 계단 코스가 끝나고 평지 같은 완만한 산책로가 펼쳐진다. 고지대에서만 산다는 야생화가 이정표처럼 남은 길을 안내해 주는 듯 같다.


... 5부에서 계속됩니다 ...




Fool in the rain은 Led Zeppelin이 1979년에 발표한 곡으로 라틴 리듬에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이 조화를 이루는 경쾌하고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Fool in the rain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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