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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연두 Oct 15. 2021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다가, 했던 일을 되짚어본다.

작년 12월부터 묻혀놨던 글을 업데이트해 올리기

어릴 때부터 많이 듣는 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의 장래희망 칸은 초등학교 시절, 박사, 과학자, 선생님, 디자이너, 소설가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 연구원으로 끝났던 것 같다.


장래희망은 중구난방이었지만, 뭘 하고 사는 게 좋을까에 대한 고민은 인생 내내 따라다니고 있다.


1. 입사


어릴 적에 흔히들 했던, 뉴스에 나오고 자서전을 쓰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은, 회사를 들어가면서 깨졌다. 당시 같이 입사했던 신입사원만 6~7천 명이었다. 나는 거기서 전공은 맞지 않았지만 점점 커져가는 회사의 인력을 채우기 위해 뽑은 '이과생'일뿐이었다. 대학 졸업할 때 받았던 상도, 여러 번 받았던 장학금도, 나라는 사람의 효용가치를 알려주지는 못했다.


그 분야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던 나는 공장으로 배치되었다.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공장이었던 만큼, 업무강도는 높지만 인정을 잘 받지 못해 사람들이 꺼렸던  부서이다. 공장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하는 것도 그리고 주말 출근도 당연한 일이었다.

 

회사는 이제까지 내가 알던 세상과 많이 달랐다. 새로운 모델 양산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된 듯 구는 것도 너무 이상했지만, 8시 출근이지만 7시 20분에 미팅을 잡고, 5시 퇴근이지만 10시가 넘어야만 퇴근할 때 당당히 인사를 하고 나갈 수 있는 것까지 이상한 것 투성이었다.


사람들도 안 되어 보였다. 7시도 되기 전에 출근해서 12시가 다 되어서 퇴근하며 365일 중에 363일 출근하는 과장님이나, 야근하느라 상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성과급을 약 지어먹는데 다 쓰는 것 같다는 대리님까지. 진정 여기가 대한민국에 젤 큰 기업이 맞는지, 지금이 20세기가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건 아닐까?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딱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기나긴 신입연수와 자사 연수, 부문 연수, 하계수련대회 기간을 빼면 현업에 있던 시간은 3달도 안 되었다.



2. 대학원

그전까지 큰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았던 나는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무작정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를 공장에 배치하자마자 대학원에 지원했고 합격하자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다.


급하게 지원했던 대학원은 남들이 보면 그럴싸한 명문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부시절 이미 내 길이 아님을 깨달았던 전공 공부가 나아질 리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각종 올림피아드를 휩쓴 자대 출신 동기들은 나와는 달랐다. 원래 과학 쪽으로 발달된 아이들인 데다가 학부부터 열심히 실험하고 논문을 썼기에 이미 출발선부터 달랐다.  벌어진 차이를 좁히기에 나는 재능도 노력도 부족했다.


대학원 내내 방황을 했지만, 대학원 막판에 기적적으로 나온 실험 데이터로 졸업논문을 쓰고 졸업할 수 있었다. 방황도 졸업도 모두 전적으로 마음 넓으신 지도교수님 덕분이었다. 그래도 방황하던 대학원 시절, 1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회사에 지원을 빠르게 합격을 했다. 마지막 학기에도 몇 군데 더 지원을 했지만 최종면접이 겹쳐서 한 곳은 포기했고 다른 한 곳은 떨어졌기에, 결국 1학년 때 합격했던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3. 또다시 입사


사실 나의 첫 회사는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토익점수조차 없이 합격해, 합격 후에 토익을 보고 점수를 제출했을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진행되었다. 그래서인지 금방 그만두었고 생각 없이 간 게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좀 더 많은 고민을 했다. 그렇게 골라놨던 회사 중 하나가 바로  회사였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아무리 나아도 회사는 회사였다. 몇 안 되는 월급을 주면서 왜 이리 부려먹으려고 하는지.. 왜 말도 안 되는 걸 자꾸 나에게 시키는지.. 석사까지 나왔는데 왜 이리 일이 고된지.. 허리, 다리, 목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가족이 있는 서울을 떠나 너무도 재미없는 도시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나는 우울해졌다. 하지만 또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그저 그 시간을 견디고만 있었다.


매일 "퇴사하고 싶다", "서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버텨냈다. 대전에서 마지막 6개월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매일 자정을 넘기며 퇴근을 하며 일했다. 좀비처럼 일어나 일을 했고 살이 쭉쭉 빠졌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연구소 생활에도 변화는 있었다. 입사한 지 만 4년이 될 때쯤.. 본사 프로젝트 팀에 가게 된 것이다. 6년 만에 돌아온 서울생활은 너무나 달콤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4. 서울로


'중국 사업 잘해보라고 해'라는 말 한마디로 시작된 프로젝트팀은 관련 부서의 견제 속에 미션조차 제대로 수립하지 못 한 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프로젝트팀이 해체되면 나는 언제든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늘 불안했다. 미션조차 제대로 없었던 팀이었지만, 급하게 떨어지는 오더들을 처리해주며1년하고도 7개월 동안 버텨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프로젝트 팀이 해체가 결정되었을 무렵, 감사하게도 가고 싶었던 팀에서 나를 받아주기로 했다. 드디어 불안정한 프로젝트 생활을 끝나고 정착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발령이 난 날 바로 다른 프로젝트팀에 끌려가며 그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그 사이 동기들은 모두 승진했다. 나의 커리어는 갈피를 잃었고 나만 아직도 대리였다. 그래도 두 번째 프로젝트팀은 초기엔 의미 있는 일을 할 거 같다는 희망을 줬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도 점점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두 번째 프로젝트팀의 리더는 나와 연차가 같았고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업무를 모른다는 점에서 나와 차이가 없었지만 나에게 없는 자신감과 보고 스킬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심지어 업무 외의 행사 참여였다)을 나에게 시키기 위해 '남들이 볼 때는 너는 신입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미 나는 만 6년 넘게 회사를 다녔었고 석사까지 치면 8년이었다. 비슷한 연차가 리더 하는 팀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격지심이 생기는데, '신입' 발언은 너무 쓰렸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부문장을 찾아갔다.


결국  프로젝트에서 나와  다른 팀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기나긴 떠돌이 생활에서 벗어나 정식팀으로 가니 더 이상 언제 팀이 없어질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업무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팀장 다음으로 연차가 높은 팀원이었다.


부문장 면담 덕분인지, 챙겨준 팀장 덕분인지, 이듬해 승진을 했고, 미뤄왔던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여전히 업무는 막막했다. 무거운 몸으로 야근을 하며 고민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노력해도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당시 나를 참 힘들게 했다.



5. 출산, 육아휴직


출산과 함께, 힘들게 끌어왔던 7년 반의 회사 생활은 잠시 멈췄다. 회사만 안 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육아는 다른 차원의 힘듦이 있었다. 일단 잠을 못 잤고, 밥 먹이고 기저귀 치우고 재우는 과정이 끝도 없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인간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 해외 이직에 성공했다. 6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스웨덴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여행 온 듯 설레었던 한 달이 지나자 힘듦이 밀려왔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고, 간판의 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타향살이. 아이는 어렸고 날씨는 너무 추웠으며, 해를 볼 수 없는 날씨가 이어졌다.


 와중에서도 나를 놓지 않으려 저녁시간에 아이를 남편에게 스웨덴어 코스를 다니기도 하고, 모임을 나가 친구를 사귀려 노력했다. 스웨덴에 있는 회사에 지원하기도 하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휴직 마지막 한두 달 동안은 토플 공부에 매진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육아휴직이 끝났다.



6. 첫 번째 복직, 두 번째 육아휴직


다시 돌아간 회사는 처음에는 너무 좋았다.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인터뷰를 보지 않아도,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그냥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두 달도 안 되어서 휴직 전처럼 '회사 가기 싫어' 상태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복직한  3개월 후, 남편은 4개월짜리 육아휴직을 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스웨덴에서 하루 종일 애만 봤는데, 하루 종일 애 보는 사위는 안 되어 보였나 보다. 귀국 한 달 만에 엄마가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제안했다. 남편은 오전에는 아이를 봤고 오후에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이직 준비를 했다.


남편의 4개월간 육아휴직은 금세 끝이 났다. 남편이 다시 스웨덴으로 떠나고 나니, 나는 회사를 다니며 2살 난 아이와 씨름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내 뱃속에는 둘째까지 있었다. 배가 불러오면서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한시도 내 시간이 없었다.


배가 점점 불러와 쭈그리고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 힘든데, 아이는 자꾸 떨어진 물건을 주워달라고 소리쳤다. 임신 초기부터 시작된 치골통과 요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이와 책을 누워서 읽으면 허리 통증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조차 없어 혼자 끙끙거렸다. 하지만 남편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한계가 다다를 때 남편이 휴가를 내고 한국으로 오곤 했고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둘째 출산예정일을 앞두고 남편은 두 번째 육아휴직을 썼다. 그리고 그 휴직은 아이가 한 달이 되었을 때 끝났다.



산후조리도 다 끝나지 않은 몸으로 갓난쟁이와 3살 아이를 한꺼번에 봐야 했다. 그런데도 스웨덴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고생했던 기억만 가득해서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둘째가 6개월이 되고 나서야 스웨덴에 다시 가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애들에게도 아빠가, 남편에게도 가족이 필요할 것 같았다.


두 번째로 간 스웨덴은 훨씬 나았다. 거리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고 한국 교민들은 많아졌다. 상처뿐이었던 외국인 친구 사귀기도 스웨덴 회사 구직활동도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사람들을 만나고, 스웨덴에서 하는 영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티브이와 세탁기를 구입했다. 처음에 스웨덴 갔을 때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tv하나 없이 8개월을 버텼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부지런히 영어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친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대학원 입학을 위한 영어자격을 얻었을 수 있었다. 혹시 다시 스웨덴을 가게 된다면 대학원이라도 다닐 수 있도록 말이다.



7. 두 번째 복직


9월 말 나의 복직과 함께 남편의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귀국 일주일 만에 극적으로 남편은 두 아이를 모두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을 찾았다.


나에게는 그렇게 힘들었던, 그리고 너무 간절했던 자유시간이 있는 육아휴직. 그것이 남편에게는 또다시 어렵지 않게 찾아왔다.


그런데도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남편은 늘 화가 나있었다. 고작 아이들과 3~4시간 있던 건데도 남편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있었다. 그런 남편이 못마땅해 나도 화가 났다. 6개월의 육아휴직이 끝나면 남편은 스웨덴에 가야 했고 그러면 나는 또 회사를 다니며 힘든 독박 육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또 꾸준히 이직 준비를 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없었다. 남편이 복직할 때쯤, 코로나로 전 세계 항공편이 마비되었다. 비행기가 기약 없이 취소되기 시작했고 남편이 다니던 회사는 재택근무를 연장했다. 그래서 스웨덴에 가는 대신 남편은 오후 4시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남편이 아침에 아이를 보내면 첫째는 엄마가 받아주셨고 둘째는 내가 퇴근길에 데려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둘째 픽업을 위해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섰고 퇴근과 함께 육아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떨어져 있는 것보다 힘들었다. 아이들은 남편이 들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이들을 챙기느라 두배로 힘들었다.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기에 아이들은 자꾸 방치되었다. 이따금씩 남편은 재택근무하다 말고 나와 애들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돌아다닐 때 남편은 예민해졌다. 이제까지 없던 취침시간이 생겼고 그 시간에 맞춰 재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와서 아이를 보고 재우다 보면 억울함이 밀려왔다.



8. 또다시 대학원?


그러던 와중에 지원해놨던 대학원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코로나에 비자 연장 문제까지 겹쳐서 합격했지만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상하게도 남편은 그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나는 지금도 회사에 육아에 너무 힘든데 풀타임으로 대학원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 때문에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거 같아 미안한단다.


그런데 대학원에서 나를 비자가 갱신된 셈 치고받아주기로 했다. 코로나라서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니 한국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바로 개강 4일 전이었다.


그렇게 힘든 회사-육아에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퀘스트가 하나 추가되었다. 8시 이전에 수업이 있을 때는 부모님이 도와주시고 8시 이후부터 잠잘 때까지는 남편이 아이를 봤다. 남편은 중간에 아이를 돌본 시간만큼 더 늦게까지 일했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아이들을 보고 수업을 들으며 과제를 하고 조모임을 하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남편이 애들을 데리고 나갔고 나는 끝없이 과제를 하고 공부를 했다. 회사일이 남아있을 때면 밤늦게 회사일도 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르는 채로 그냥 바쁘게 주어진 일을 해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원하던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다. 11월 중순 남편이 퇴사와 입사를 위해 스웨덴으로 갔다. 2주 일정에 2주간의 격리를 더해 한 달 동안 남편 없이 회사를 다니며 아이를 돌보며 수업을 듣고 조모임을 하고 과제를 내야 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 아빠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기 시작했다. 수업이 있을 때 애들을 봐주시고 늦게까지 수업이 있을 때면 재워주시기도 했다.


어찌어찌 한 달이 흘렀고 남편이 돌아온 지 이제 1주일이 조금 넘었다. 남편이 이직한 회사에서는 세금 문제 때문에 재택을 하더라도 스웨덴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남편은 1월에 다시 스웨덴으로 가게 되었다


 와중에 나 스스로는 올 한 해 회사일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팀장은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다며 나쁜 고과를 주겠다고 말했다. 대학원은 첫 학기조차 끝나지 않았고, 내년에 2개의 시험과 2개의 조 과제 발표가 남아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고 설상가상으로 대학원 공부는 재미가 없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남편은 곧 갈 것이고, 나는 또 아이들과 고군분투를 시작해야 한다. 난 뭘 하고 있는 것 일까.



여기까지가 20년 12월에 썼던 글이다...



9. 퇴사, 그리고 다시 스웨덴


결국 이듬해 나는 대학원을 휴학했고 그 와중에 다른 대학원에 지원했다. 그리고 남편 없이 버둥거리며 반년 넘게 지냈다. 주말에 혼자 4살 6살 아이 둘을 데리고 돌아다니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아이들 데리고 멀리 놀러 가고 싶어도 엄두가 안 났다. 혼자 애들을 데리고 서울 대공원 다녀온 날, 주차해놓은 차를 찾지 못해 한적한 인도에 돗자리를 펼쳐 아이들을 앉쳐놨다. 어렵사리 찾은 차는 빼다가 사고 나기 딱 좋은 상태였다. 남동생이 가는 길만 운전을 해줬는데, 앞뒤가 좁은데 무리해서 차를 대놓고 간 데다가 그 이후에 양옆으로 빽빽하게 차들이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은 길바닥에 내버려져 있지 차는 뺄 수가 없지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그 와중에 회사일도 지지부진했다. 연말 열심히 해보자 다짐하고, 팀장 의견을 최대한 맞춰주려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작년에 안 좋은 고과를 받았으니 또 나쁘게 주지는 않겠지만, 퍼포먼스로만 봤을 때는 고과를 못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맘대로 하고 그러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내 의지가 아닌 일이 결과가 안 좋으니 재미도 없고 너무 회사에 가기 싫었다.(그래도 다행인 건 팀장은 작년보다 올해 훨씬 성장했다고 생각했단다.)



대학원 합격 그리고 아이들 어린이집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젠 회사를 그만두고 살림을 합쳐야겠다 싶어졌다. 퇴사 의사를 밝히자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하셨다. 엄마가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닌데. 엄마는 너무 많이 도와주고 있었는데. 내 새끼 내 힘으로 못 키우는 우리 잘못이지, 언니 애들 챙기랴 우리 애들 챙기랴 정신없는 엄마가 왜 미안해하시는지 모르겠고 엄마 생각만 하면 자꾸 눈물이 났다. 너무 많은 짐을 지워드려서 늘 죄송스럽고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생활도 잘 못 하고 출세할 수도 없는 사람인데 더 서포트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죄송스러웠다. 만약 엄마가 "애 둘 전담으로 봐줄 테니 너 회사만 열심히 다녀" 했어도 높이 못 올라갔을 텐데 말이다,  애들 없고 결혼 안 했을 때도 못 했던 건데 뭐..


이제  스웨덴에 다시 온지도 2달이 되어간다. 애들 적응시키던 보름, 맨날 논문만 번역기를 돌려서보고 5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던 한 달, 그리고 강의 들으면서 조모임 하는 보름.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처음 스웨덴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애들 교육도 신경 쓰고, 화도 안 내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그러자 했는데 생각보다 잘 안 된다. 애들 어린이집 갔을 때 거의 딴짓 안 하고 학교 공부만 잡고 있는데,  영어가 딸리니까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효율이 안 난다. 게다가 화상으로 강의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되니까 자꾸만 딴짓을 하게 된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도 하고 스웨덴어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이도 저도 아니다.


다행히 이번 전공은 재밌을 때가 많고 논문도 읽다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너무 잘하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면 뭐라고 되겠지. 그렇게 되뇌며 불안함을 잠재워본다.


어디 있든 안 불안했나. 절대 나가라는 소리 안 하는 회사에서도 늘 불안했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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