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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벅스 Oct 12. 2021

린다의 가위

린다 시리즈 마음의 가위

 가위가 무뎌졌다. 칼 가는 것을 찾아 가위를 아래위로 여러 번을 비볐다. 구멍 난 양말을 자르니 스르륵 잘린다. 이제 무엇이든지 잘 자를 것 같다. 

 

 우리도 살면서 잘라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럴 때 마음의 가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너무나 평범한 말이지만 자신의 삶을 위해서다. 그럭저럭 한 삶이 아니라 이왕이면 ‘멋진 삶’을 위해서다. 이것이 벅차다면 ‘후회가 덜한 삶’ 그때 ‘그러지만 않았다면, 그렇게만 했었다.’ 면에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서다.      

   

 가위로 후회를 자른다면 없어질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후회는 커지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지인은 가족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했다. 나이 50이 된 그가 부모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고. 30여 년을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는 듯 보인 그에게 나는 화가 났다.       

 

 화가 났다는 것은 연민이었다. “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았냐.”라고  등을 두드리며 말하고 싶었다. 등을 두드리고 싶었던 마음은 가족의 어려움을 종이 자르듯 자를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갑갑해 보일 수 있는 현실의 딱함이었다. 연민으로 생긴 나의 천둥 같은 소리가 그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지금 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생각을 마음의 가위로 자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도 그는 희생은 강요받지는 않았겠지만 선택을 했을 것이다. 지금껏 힘든 선택을 한 그는 지나온 삶에 지쳐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50줄에 들어선 그가 이제 자신을 돌아보았다. 60,70줄에 들어서 돌아보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 위안을 해본다. 지금이라도 자신을 다듬을 가위를 꺼내 가꾸어야 한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가족을 돌보며 받아온 관심이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의 긍정 적면은 자기애, 자기 존중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자기 존중감을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두 개가 공존하겠지만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을 때가 아니겠나. 적절한 시기에 자신을 위한 마음의 가위를 쓰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서 어느 것을 지키고 무엇을 잘라야 하는지 수없이 생각하고 가위를 들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빚은 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빚은 갚지 않으면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빚은 갚아야 한다. 자신에게 갚지 못한 빚더미에 눌려 후회라는 탄식으로 갚지 않았으면 한다.      

 

 가위, 살면서 자신을 위한 마음의 가위를 써 본 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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