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Feb 06. 2018

그럴 수도 있지 뭐


쨍그랑!



아침에 세수를 하고 있는데 앞에 올려두었던 유리병이 넘어져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요즘 메이크업 클렌징을 따로 사지 않고 코코넛 오일을 쓰고 있는데, 역시 욕실 제품이 유리병으로 나오지 않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부엌에 있어야 할 녀석을 그대로 욕실에 두고 썼더니 이런 사단이 난 것 같다.

성급히 잡으려다가 손가락에도 살짝 상처가 났다.

붉게 뭉글뭉글 올라오는 핏방울을 씻어내며 세수를 했다.


보통 아침에 이런 일이 생기면 재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 종일 찝찝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런 내 생각이 재수 없는 하루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안녕, 코코핀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더 이상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아직 반도 채 쓰지 않은 코코넛 오일이 아깝긴 하지만.

(참, 좋은 코코넛 오일은 쓰임새가 참 다양하다. 헤어팩, 메이크업 클렌징, 모공 노폐물 제거, 바디 오일 등!)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다. 

전기세가 다른 집보다 너무 나와서 계량기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계량기 검침을 요청했는데, 오늘이 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문제가 있는지는 꽤 되었는데, 독일의 행정 처리 시스템보다 더 느려 터진 내 행동력 때문에 몇 달이 지나서야 검사를 받았다. 

검침 비용으로 70유로, 한화로 약 1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냈다.

전기 계량기에 문제가 있으면 그 돈을 돌려받고, 문제가 없으면 환불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계량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했는데 계량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비어 가는 지갑 속에서 70유로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속상했다.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두 번째 '그럴 수도 있지' 타임





그렇게 두 번의 '그럴 수도 있지' 타임을 보내고, 요즘 운영 중인 상담소와 구매 대행 사업에 관련된 일로 파트너인 썸머와 '카카오톡 회의'를 하고 하루가 어느 정도 갔다. 그리고 따뜻한 흰 밥에 간장에 조린 버섯과 양파를 비벼 미역 된장국과 함께 이른 저녁을 해결한다. 다음은 어제 너무 피곤해서 쉬었던 헬스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장도 봐야 한다.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 역시나 4시부터 해가 지기 시작해 어두워졌기에 내가 밖을 나선 시간은 이미 밤 10시처럼 깜깜했다. 헬스장도 마트도 밤 10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조금 발걸음을 서둘렀다. 생각보다는 무사히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본다. 




파스타를 해먹고 싶었는데 정작 파스타면을 빼먹은 장보기...(?)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고 장을 본 물건들도 무거워 팔이 떨어질 것 같은데도 기분이 좋다. 

별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보냈는데, 아니 어제는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이불속에 꽁꽁 숨긴 날이라 오늘 아침까지도 멍-했는데, 심지어 아침에 속상한 일이 두 가지나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프로틴바, 이름보다는 맛있는 녀석이었다.





헬스장에 가는 길에 처음 먹어본 딸기 요거트맛 프로틴 바가 맛있어서일까?
한 달도 못 가고 그만둘 것 같았던 헬스장을 두 달째 다니고 있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보다 더 바쁜 파트너에게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위로를 받아서 일까?
오랜만에 꽃을 사와서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방마다 초를 켜두어서일까?





기분이 좋아서인지 세일을 해서 사온 귤이 지금까지 사 먹은 귤 중에 가장 달고 맛이 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살았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나는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소극적으로 사느냐, 적극적으로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아마도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느라 내 삶에 소홀했던 시간이 더 많을 거다.



그래도 오늘은  '그럴 수도 있지' 주문으로 새로운 하루를 살아냈다.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하루 종일 짜증만 부리던 내가 이제 '그럴 수도 있지'라고 훌훌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스스로 원해서 운동을 하고 있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살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운동을 한 뒤의 그 기분이 좋아서 운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참 평범한 하루인데, 내 눈에는 참 반짝반짝 빛이 나고 예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는 주문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주문을 외우는 2월을 살자. 




*2018년 37번째 선물: '그럴 수도 있지'라는 2018년 좌우명을 얻다.






글, 사진: 노이

커버사진: Photo by Gabby Orcutt on Unsplash







덧. 2월 한 달 동안 온라인 무료 상담의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배우면서 살아오느라 바빴는데,
정작 인생을 어떻게 사는지는 누구에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곳은 전문가가 운영하는 공간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격이 있다면 
'진심'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공간을 열게 되었어요.   


진심을 다하는 상담소, '7pm 페이퍼' https://lifeartlab.blog.me/221194399381

매거진의 이전글 잊어버리고 있던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