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Dec 30. 2018

내년에도 또 이렇게 살고 싶다



오랜만에 아주 이른 새벽에 눈이 뜨였다. 

날짜란, 시간이란, 사람들이 그저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2018년이 벌써 다 끝나간다는 사실에 마음은 뒤숭숭해지고 드물게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한 해를 되돌아보면 늘 잘한 일보다는 잘하지 못한 일이 마음에 남아서 반성보다는 나를 자책하다가 울적해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연말연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반성이라 함은 되돌아보고 나를 점검하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인데 이미 성인이 되어 10번도 넘는 연말연시를 반복하면서 내가 크게 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반성이 자책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작년보다는 마음의 회복탄력성이 꽤 좋아져서 올해는 울적해진 마음이 일주일도 넘기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시작되기 전부터 생일이 있는 2월 말까지는 1년 12개월 중에 내가 가장 오래 우울한 시간들이다. 그나마 올해 조금 달라진 것은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아, 이 시간이 또 오는구나.' 알아차렸음에도 나는 끙끙 앓아야 했다. 유난히 어둡고 음울한 독일의 겨울 날씨 탓도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 다가 아니다. 작년에는 유난히 앓아서 독일의 겨울이 역시 무섭긴 하구나,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나의 겨울은 아팠다. 그래서 나는 이번 겨울만큼은 독일 날씨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비타민 D를 더 열심히 먹었다. 




어젯밤에는 아끼는 사람에 대해 아주 큰 오해도 했다. 밤에 잠을 거의 못 잘 정도로 (특기가 잠인 나에게 이것은 아주 아주 드문 일이다.) 끙끙 앓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오해를 풀었다. 오해는 너무나 어이없을 만큼 말끔하게 풀렸는데도 내 기분은 영 풀어지지가 않았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오해를 할 만큼 어리석었을까. 잘못한 건 나인데도 나 자신에게 너무 모질게 굴지 말라며 오히려 앞으로 자기가 더 조심하겠다고 말해주는 위로에 마지막까지 꽁꽁 얼어있던 마음 한 구석이 스르르 풀렸다. 'Don't be hard to yourself.' 한 해의 마지막을 코 앞에 둔 이 순간까지 어쩌면 나는 참 어쩜 이렇게 아직까지도 어린아이 같은지. 그래서 더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살아보면 그냥 12월 31일도, 1월 1일도 그냥 '어제' 이거나 '오늘'인 내가 살아가는 수많은 하루하루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이 아직도 내 마음에는 큰 파동을 일으키곤 한다. 특히나 올해 못한 일에는 인간관계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속상했다. 올해 못 이룬 일은 내년에 다시 도전하면 되지만, 올해 잃은 사람들을 내년에 다시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겠지. 그래서인지 올해의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아준 사람들이 더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특히나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걱정을 끼치고 신세를 끼치고 있는 부모님에게 너무너무 죄송했다. 올해만큼은 꼭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올해만큼은... 꼭 그러고 싶었는데. 한 번 시작된 자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또 같은 연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그 자책의 보이지 않는 꼬리를 싹둑, 잘라내었다.




모든 건 결국 '순간의 알아차림'이 좌지우지한다. 내가 비록 1초 전까지 울고 있었어도, 따뜻한 위로나 농담에 금세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울고 있는 시간조차 아주 빠르게 과거가 된다. 찰나는 시시각각으로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내가 지금 우울하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아주 빠르게 과거가 된다. 그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이다. 




그래서 일단 멈추었다. 

내 눈 앞에는 항상 두 갈래의 길이 있다. 

내 길은 항상 갈림길이다. 

그 길을 번갈아보며 바라보았다.

왼쪽에는 아주 많이 못한 내가 있고 오른쪽에는 조금 잘한 내가 있었다.

왼쪽에는 기본 생활비조차 벌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내가 있고, 오른쪽에는 한 달 식비라도 번 게 어디냐며 장하다고 칭찬해주는 내가 있었다.

왼쪽에는 이 나이를 먹고도 엄마에게 빚을 진 못난 나를 자책하는 내가 있고, 오른쪽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엄마에게 다정했던 한 해를 보냈다고 웃음 짓는 내가 있었다.

계속 왼쪽만 바라보고 울던 나는 고래를 돌려 반대쪽을 보았다.

고개를 돌린 것 만으로 어느새 자책하던 나는 과거가 되었다. 

계속 오른쪽을 바라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오른쪽에 펼쳐진 길이 조금씩 조금씩 더 넓어졌다. 

올해 나는 사람들 몇을 잃었지만, 살아온 그 어느 해 보다 가족과 내 사람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깊이 느낀 한 해였다는 것이 보였다. 

올해 나는 원하는 만큼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세상 모든 걸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내 마음을 우울과 좌절에서 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힘을 얻었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올해 정신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것이,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참 기쁘고 뿌듯하다. 





2019년이 어떤 해가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떤 해를 살고 싶은 지조차 아직은 잘 모르겠다. 

또 실험하고, 실패하고, 울다가, 또 웃겠지.

그래도 딱 2018년만큼만 살아도 좋겠다.

내년에도 또 살고 싶은 한 해를 살았다는 기분이 든 건 처음이다. 





참, 그래도 돈은 조금 더 많이 벌어야겠다.











글쓴이: 필명 노이. 영어 이름으로 독일에서 쓰고 있는 이름이기도 해요.

30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쓰려고 독일에 왔다가, 독일이 너무 좋아서 2년째 거주 중입니다.

탈회사원을 선언한 뒤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글 쓰고, 영상 찍고, 명상하고, 구매대행 일을 하고 있어요.

구매대행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 마음에 드는 것들만 올려두고 있으니 구경 오세요. :)


- 구매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사진: Photo by Alvaro Reyes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누구를 위해 예뻐지고 싶었던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