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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07. 2019

시작을 망설이고 있나요?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은 이미 많은데



독일에 있으면서 한 가지 내 삶에 일어난 작은 변화는 누군가의 졸업 연주회에 갈 일이 1년에 한 번 씩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연이 닿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한 번도 누군가의 졸업 연주회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에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온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보니 이 좁은 인연에도 그런 인연이 생겨서 지난달에는 한 동생의 졸업 연주회를 축하하러 가게 되었다. 잘 모르지만 함부르크에는 음대 학생들의 졸업 연주회를 가지는 장소가 비슷비슷한 것 같다. 작년에 갔던 곳과 같은 장소였는데 우리 집과 정반대 방향이라 가는데만 족히 1시간 정도는 걸렸다. 분명 전날까지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일에 정신을 놓고 깜빡 잊는 바람에 한 시간 전에 부랴부랴 챙겨가느라 입장 시간을 놓쳐버렸다. 그래도 꽃다발은 못 사더라도 작은 크리스마스 스노우볼과 초콜릿을 선물로 사들고 갔다. 더 좋은 걸 사주지 못하는 마음이 괜히 미안했다. 최대한 서둘렀음에도 나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연주 시작 시간이 되면 문은 칼같이 닫히고 연주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입장할 수가 없다. 조그만 콘서트홀인지라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만으로도 연주자의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쉬는 시간에 맞춰서 입장할 수 있었고 2부 연주는 들을 수 있었다. 졸업 연주회는 보통 1부, 쉬는 시간, 2부 연주로 나뉘어 있어 쉬는 시간에도 입장하지 못했다면 나는 영영 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아 뛰느라 놀란 심장과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뒤 2부에 시작되는 플룻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동생도 이런 졸업 연주회는 처음이었겠지만, 나에게도 플룻 라이브 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괜스레 나까지 떨려왔다. 그녀의 긴장감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이 먼 곳까지 유학길을 떠나와 주말 시간까지 아껴가며 졸업 연주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왔을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마치 내 기억인 듯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음악을 잘 알지 못하지만 눈감고 편안히 즐길 수 있었던 훌륭한 연주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연주회로 평가된 성적이 곧 그녀의 졸업장에 쓰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졸업성적표를 따로 준비하는 게 아니라 졸업장에 바로 점수가 적히다니 살벌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일까. 힘들었던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라며 괜히 나까지 앞에 있는 지도 교수의 반응을 힐끗힐끗 살피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고 판단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좋은 분 같았다. 하지만 평가는 공평하게 치러지기 위해서 지도 교수가 아닌 다른 교수들이 진행한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잠재우고 난 뒤, 온전히 지금 이 순간 플룻을 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득 작년에 같은 장소에서 다른 지인의 피아노 연주를 보았던 기억이 겹쳤다. 요즘 사람들은 늘 새로운 가수들의 새로운 노래를 듣는 것에 익숙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은 수십 세기 동안 발전해온 그때 그 악기를 가지고 2백 년도 전에 지어진 오래된 곡들을 치열하게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을 한다. 지금까지 지구 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곡을 연주하고 연주하고 또 연주해 왔을까? 특히 요즘처럼 명연주를 디지털 파일로 오래오래 보관할 수 있게 된 세상에도 말이다. 









예전에 인천 공항에서 로봇들이 나와서 단체로 춤을 추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로봇들이 공공연하게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게 일상이 될 나날도 곧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 같은 로봇이 나와서 플룻을 완벽하게 분다고 한 들, 사람이 연주한 것과 똑같은 감동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저 사람의 모습을 한 스피커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악기를 부는 그 사람이다. 악기의 좋고 나쁨도, 곡의 난이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연주를 하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모든 게 서로 빠르게 변화하기 위해 내달리는 이 현대 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음률로 우리를 달래는 이 오래된 옛 멜로디가 왠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좋아지고 있다. 






같은 악기, 같은 곡이지만 부르는 사람에 따라 그 감동이 달라지는 그 묘한 차이.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사람만이 뿜어내는 그 고유한 에너지. 

그것을 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일까. 






이미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써두었으니, 내 이야기는 그다지 관심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글쓰기를 망설여 왔던 나. 

브런치를 시작하고 2년 2개월이 지난 지금 나에게는 브런치가 그녀의 플룻 같은 존재였다. 

다른 곳에도 글을 쓸 수 있는 곳이야 얼마든지 많지만, 브런치가 아니면 쓰지 못했을 나의 글들. 

브런치를 시작하던 초기 예상하지 못했던 높은 조회수가 부담스러워 몇 번을 혼자 슬럼프를 겪기도 했고, 여전히 그 못난 생각들은 잊을만하면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그냥 보기엔 비슷비슷한 인생 이야기, 나만 겪은 것도 아닌 일들에 대한 이야기.

다른 누군가가 이미 더 좋은 글로 써두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돌렸던 날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시대에 태어나 이런 삶을 산 건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올해에도 멈추지 않고 하나뿐인 내 삶을 이렇게 저렇게 풀어놓아 보기로 한다.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내 자리는 없을 거야.'라는 못난 생각은 올해부터 접어두기로 한다. 

결국 내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좋아해 주면 그저 감사히 생각하면 되고, 봐주는 사람이 적으면 받는 기대치도 적으니 하고 싶은 걸 부담 없이 자유롭게 다 표현하면 될 일이다. 




우린 모두 '삶'이라는 같은 여행을 하고 있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남들이 더 잘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개발을 잘하는 사람도 많고, 나보다 놀기를 잘하는 사람조차 더 많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 앞을 걸어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보다 이미 잘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건 더 이상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누군가를 이기기만 하려고, 누군가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만 살고 있다면, 그 삶의 끝은 얼마나 허망할까. 

우리는 그저 각자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이 곳에 왔다. 이긴다면 나를 이겨야 하고, 지지 않는다면 내게 지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저 가장 나답게, 가장 편안하게 내 인생을 연주하고 싶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참 좋은 요즘,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꼭 마음에 품었으니 꼭 잊지 않고 꺼내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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