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주신 분 찾습니다

by 노이의 유럽일기


수업 첫 날.





드디어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첫 날.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는 맥북에 랜선을 꽂고 따뜻한 페퍼민트차를 한 잔 끓여왔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있는 곳이 곧 법당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어지럽기 짝이 없는 내 거실 테이블 한 켠을 바라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수업 시작 전에 거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역시 나라는 인간은 금요일이 되면 게을러져서 전부 다 치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테이블 위는 제법 정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수업 시작 10분 전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수업 준비중'이라는 슬라이드 화면과 함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모두 조용히 수업을 기다리는 분위기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 주 부터는 교재의 내용에 맞춰서 진행되는 수업이라 확실히 분위기나 내용이 입학식 때나 오리엔테이션 때와는 달랐다. 법륜스님 특유의 적당히 느릿한 템포의 목소리에 맞추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부터 차근차근히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예습을 하지 못한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첫 수업은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사회 - 상처받은 사람은 있는데 상처 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 과거에 내가 보고 듣고 배우고 겪은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의 평안과 안정, 그리고 행복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한다. 법륜스님은 그것을 마치 양동이를 뒤집어 쓴 사람 같다고 했다. 눈을 뜨고 있고, 앞이 보이긴 보이는데, 양동이 안만 보이고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말이다. 정말로 내가 양동이를 뒤집어 쓴 채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자꾸 일어나도 또 넘어지고 일어나도 또 넘어지고 하는 구나.
그걸 괜히 남탓을 하거나 내가 부족해서 라고 생각했구나. 그건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양동이 때문에 눈 앞에 있는 돌멩이를 못본 것은 생각 못하고, 그 곳에 박혀있는 돌멩이만 탓했구나.





상처받았다고 앓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상처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서로가 앞이 보이지 않아서 부딪쳐서 서로 상처주고, 상처입은 것을 내가 입은 상처만 너무 아려서 다른 것은 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그저 무엇이 우리를 상처입게 하는 것인지 모르고 살아왔을 뿐이다.






이번에는 우리 모두가 양동이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고 상상해 봤다. 서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자주 꽈당 하고 부딪힐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상처를 입고 반대쪽으로 도망을 갈 것이다. 그래도 상대방이 양동이를 벗은 사람이면 좀 낫다. 그 사람이 앞이 보이니 피해주거나 나를 끌어주니까. 그런데 그건 그 사람하고만 괜찮은 것일 뿐, 다른 사람을 만나면 나는 또 부딪히고야 만다.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 부딪힌다는 사실은 모르고, 부딪친 사람에게 미움을 가지거나 화를 내버린다는 것이다. 좋은 의도도 나쁜 의도도 없이 그냥 서로가 나자신으로 살아가다 부딪히는 과정마저도 공격적으로 받아들여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도 일어나고는 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건 내가 양동이를 벗어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혼자 걷다가 넘어지는 일도 줄고, 다른 사람들이랑 부딪칠 일도 줄어든다.






양동이를 쓴 사람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이해하기에 2%가 부족했던 나는 또 다른 예시를 찾아 궁리했다. 그러다가 생각의 끝에는 '양동이'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를 감추기 위해 매일 아침 쓰고 나간다는 그 '가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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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실제로 가면을 써본 적이 있는지? 나는 베네치아에 여행을 갔을 때 기념으로 사온 가면을 써봤던 적이 있다. 가면을 쓰면 앞을 볼 수 있기는 하여도 시야가 아주 갑갑해진다. 볼 수 있는 폭이 대폭 줄어들고, 전체적으로 갑갑해서 내가 있는 공간을 인지하는 공간지각능력까지 떨어지는 기분마저 든다. 내 몸의 일정 부위가 제한이 되니 몸 전체의 세포들도 긴장 모드에 들어간다. 움직임이 축소되고, 공간지각능력도 떨어지고, 일단 무엇보다 그냥 정말 불편하다. 그저 작은 물건 하나 내 몸에 걸친 것 뿐인데, 얼굴을 가리는 것을 쓴다는 건 머리 위에 쓰는 모자랑은 확연히 달랐다. 결국 오래 쓰고 있지 못하고 금방 벗었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진짜 나를 숨기기 위해서, 무난하게 섞여 살기 위해서 매일 아침 가면을 쓰고 나간다고 말이다. 설령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이라고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나다워 지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늘 어딘가 마음이 불편하다. 불편한 마음은 몸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나를 가렸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그런 가면을 쓰고 있다. 상대는 진짜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도 내가 쓴 가면에 가려서 진짜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럼 우리는 마치 양동이를 뒤집어쓴 사람들처럼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진심이 아닌데도 쿵쾅쿵쾅 부딪쳐가며 상처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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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커다란 가면을 쓰고 마주했던 특정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건 바로 '직장 상사'였다. 사회적 지위로 나보다 위에 위치한 사람들을 나는 늘 불편해 했다.

종종 직장 상사와 인간적으로 친해지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였다.

이건 한국 뿐만이 아니라 외국 회사에서도 똑같았다. 나에게 마음을 열어준 한 외국인 팀장에게 의도치 않게 서운한 경험을 안겨준 적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선생님들부터 시작해서, 교수님, 팀장님, 이사님 등등… 나를 특별히 괴롭힌 것이 아닌데도 나는 그들이 너무 불편했다. 그리고 아주 예쁘게 만든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착한 아이처럼 굴었다. 왠만하면 모든 것을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맞춰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삐그덕거렸던 또는 이해할 수 없는 상사들이 있었다. 내가 볼 때 분명 저 종이는 빨간색인데, 상사는 자꾸 파란색이라고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 조차 의견이 엇갈리는 일이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때는 이미 늦었지만) '아 그 때, 그 팀장님이 이럴 수 밖에 없었구나. 왜 이렇게 했는지 알겠다.' 라며 이해가 가는 순간이 올 때가 있었다. 팀장님은 회사가 기대하는 팀장이라는 가면을, 나는 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성실한 직원의 가면만 쓰고 서로를 바라봤기에 생긴 일들이었다. 사석에서조차 우리는 서로 그 가면을 벗지 않았다.

결코 누구도 옳지도 그르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분도 그 가면이 많이 답답했겠지 싶다.







가면을 써서 그랬구나, 하고 이해해 볼 순 없을까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는 내가 바로 내 인생의 팀장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니까. 그래서 나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마치 회사 팀장님처럼 군 것이 아닐까. 가까운 사람일 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데, 가까운 사람인데도 가끔 무례해졌던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나와 얽혀 있는 모든 관계들에게 각각 다른 가면을 쓴 채로 살아온 건 아닐까. 회사에 나갈 때 쓰는 가면 뿐만이 아니다. 사실 나는 가족, 친구,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각기 다른 가면을 써왔던 것이다. 사실 일부러 악한 마음을 품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니까 당장 상처준 것 같은 사람을 찾아서 따지고 원망해봐도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이도 그 나름대로 받은 상처가 있고 나름의 이유가 늘 존재하니까.



결국 이 모든 건 내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늘 가면을 쓰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마당에 무엇이 진정으로 나를 상처입히는 것인지도 보일 까닭이 없다. 나를 우선으로 두고,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는 가면. 그리고 그것이 지쳐서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어지지 않게 된 게 아닐까. 이제는 진짜 내 모습이 기억이 나지가 않아서 말이다. 그냥 서로 가면을 훨훨 벗어버리고, 나는 어디가 아픈 사람이고 저이는 어디가 아픈 사람인지가 유리처럼 투명하게 보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덜 아프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이 가면을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이 곳에서 천천히 배워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아마 한 번에 벗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게 쉬웠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미 벗었겠지.

그래도 오늘의 이 깨달음 만으로도 내 마음이 한 뼘 더 성장한 기분이 든다. 내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볼 때엔 가면 대신 콧수염 정도만 붙이고 나가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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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천천히 벗어도 돼 :)







<내 랜선 스승님은 법륜스님>


이 매거진은 '정토회 불교대학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생기는 에피소드, 느낀 점 등을 적은 에세이 매거진입니다. 종교 없이 평생을 살아왔고 불교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말 그대로 불교 신입생의 입장에서 온라인 불교대학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생각, 법륜스님의 강의를 통해 느낀 점, 함께 공부하는 분들에게서 배우는 점 등 제 생각이 미치는 모든 것을 써내려 갑니다.


에세이에 담긴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 법륜스님이나 정토회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정토불교대학 행정처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 글: 노이

- 사진: Photo by Ryoji Iwat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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