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10. 2022

여자 혼자 혼성 사우나 들어가본 썰


독일에 와서 겪은 새로운 경험 중에 가장 짧지만 강렬하고 떨렸던 경험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때는 2018년, 이 시국이 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독일의 남녀 혼성 사우나 문화에 내 인생 최초의 첫 발걸음을 내딛었던 잊을 수 없는 경험.






사실 그동안 기회는 많았다. 

독일에 살고 있으니 독일식 사우나에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었다는 그런 류의 기회가 아니다. 그건 바로 내가 다니는 헬스장에 헬스장 전용 사우나가 있기 때문이다. 함부르크에는 대표적인 헬스장 체인들이 있고, 저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내가 다니는 곳을 포함해서 헬스장 전용 사우나를 가진 곳들이 꽤 있다. 




함부르크는 런던 못지 않게 날씨가 안좋기로 유명해서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으슬으슬하게 추운 날씨가 제법 많다. 독일 집들은 온돌식 난방이 아니라 히터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국에서처럼 온 몸을 뜨끈하게 지질 기회도 잘 없다. 독일도 전기 장판은 잘 나온다고 하는데 전기세가 무섭다. 아무튼 이런 환경들 때문에 유럽 사람들이 겨울에 사우나를 즐기는 건 아마 한국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남녀 성별 가리지 않고 한 공간에서 알몸인 채로 느긋하게 사우나를 즐기는 남녀 공용 사우나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기도 하고, 꼭 한 번은 경험해 보고 싶은, 뭐 그런 호기심 가득한 영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헬스장을 1년 넘게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공용 사우나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헬스장에 등록할 때부터 했었다. 하지만 혼자서 도전하기엔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했고, 함께 가자고 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아니, 쿨해지려고 애쓰고 있지만 사실 내 성격상 여자 사람 친구랑 같이 샤워하는 것도 좀 어색한 지경이다. 특히나 여성 전용 사우나도 따로 있기 때문에 굳이 그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아도 나는 원하는 만큼 뜨끈뜨끈하게 사우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뭐랄까 남녀가 여럿이 다 같이 훌렁훌렁 벗고 있다는 것 자체도 나에겐 상상이 안갔다. 

'그래도 중요 부위는 다 수건으로 가리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 공간에 내가 간다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도 온갖 고민이 됐다.




'수건을 가져가도 되나? 가져가는 게 비매너면 어떡하지?'

'남들은 안가리는데 나만 가리면 실례인가?' 

'나도 모르게 자꾸 변태처럼 눈이 아래로 가면 어떡하지?'




게다가 나는 표정관리가 참 안되는 사람이라 긴장하거나 당황하는게 얼굴에 티가 아주 팍팍 나서 주위 사람들이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거나 불쾌해 할까봐 또 걱정이었다. 결국 그 걱정들은 매번 나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렇게 독일에 온 지 일년이 지나도록 도전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년이 넘어갈 때 쯤에는 점점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브라에 관해 쓴 글에서 몇몇 분이 사우나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시기도 했고, 또 어떤 한국인 남자분이 독일인 여자 사람 친구와 함께 독일 사우나에 다녀온 경험을 공유해주신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용기가 좀 더 났던 것 같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전에 한 번 용기를 내서 사람이 없는 시간에 몰래 염탐(?)을 갔다. 대충 구조라도 알고 있어야 다음에 올 때 덜 당황할 것 같아서였다. 알고 봤더니 나는 이미 그 공용 사우나 공간을 몇 번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영장과 연결된 문 하나가 바로 그 공용 사우나 공간과 바로 연결되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곳이 그저 여자 탈의실과 남자 탈의실로 나뉘는 사이의 중간 휴게 장소 같은 곳인 줄 알았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수영을 하고 나오다가 어떤 어르신의 적나라한 뒷태(?)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분도 살짝 움찔하시는 눈치라서 나는 그저 저 분이 사람이 없는 사이에 빨리 수영복을 갈아입으려다 내가 나타나서 당황하셨구나, 하고 넘어갔더랬다. 




왼쪽은 건식 사우나, 오른쪽엔 습식 사우나가 있었고 더 안쪽에는 사우나를 마친 후에 몸을 식히며 쉴 수 있게 커다란 사각형 형태의 널찍한 원목 벤치가 늘어선 '진짜' 휴식 공간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서는 천정으로부터 얼음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쌓이고 있었다. 마치 비온 다음 날 기와지붕 끄트머리에서 5초에 한 번씩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오, 저건 좀 신기하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 어디서 사람이 튀어나올까 싶어 소심해진 채 몸을 빼꼼히 내밀고 3초만에 스캔을 마치고 도망치듯 여자 탈의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전 조사를 했다. 친구가 헬스장 등록하고 안내 받을 때 같이 따라가서 헬스장 직원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일단 그 공간에 수건 한 장 정도 가져가는 건 오케이. 꼭 정해진 룰이 있는 건 아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사우나 밖에서는 수건으로 가리는 편이고 사우나 안에 들어가서는 프리하게 릴랙스 릴랙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실행에 옮기게 된 계기도 좀 쌩뚱맞았다. 

오늘은 헬스장에서 저녁에 Athletic flow라는 HIIT와 요가를 합쳤다는 클래스를 들으러 갔었다. 일반적인 요가가 조용하고 정적이라면 이건 HIIT 스타일로 신나는 음악 틀어놓고 하는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요가, 두 가지를 섞은거라고 보면 되는데, 일단 이 수업을 듣고 나는 거의 반실신 상태. (HIIT 스타일 처음 해봄...ㅠㅠ) 아무튼 이 고강도 인터벌 요가를 끝내고 나오는데 계단에서 같은 헬스장에 다니는 독일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나: "아, 깜짝이야. (한국말로 함ㅋㅋ 진짜 놀람ㅋㅋ)"


친구: (못알아들으니 그냥 웃음)


나: I'm so tired. 나 너무 피곤해. (힘이 없어서 목소리 쥐구멍에 기어들어감... 원래 독일식으로 포옹하고 인사하는데 다 생략...ㅋㅋ)


친구: What? 뭐라고?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들림ㅋㅋ)


나: Tired. I'm so tired. 피곤해, 나 지금 엄청 피곤하다고. ㅠㅠ (눈풀림)


친구: Me, too. That's why I'm going to the Sauna. 어, 나도 엄청 피곤해. 그래서 지금 사우나 갈려고.


나: (더 말할 힘도 없어서 잘가라고 그냥 손 흔들고 헤어짐)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서 독일와서 한 인사중에 제일 성의없이 대충 인사를 했다...(ㅋㅋㅋ)

친구도 막 운동을 마쳐서 피곤한 상태였는지 서로 피곤하다는 말만(ㅋㅋ) 하고 각자의 탈의실로 향했다. (친구는 남자!)




탈의실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친구의 마지막 말이 머리속에 울렸다.





"Me, too. That's why I'm going to the Sauna."


"어, 나도 엄청 피곤해. 그래서 지금 사우나 갈려고."





'사우나...? 사우나...? 지금 사우나를 간다고...?'

이 헬스장은 여자 전용 사우나와 공용 사우나는 있지만 남자 전용 사우나는 없다. 그 말인즉슨 저 친구가 지금 사우나를 가면 100% 공용 사우나에 가야만 했다. 

혹시 이 친구가 있으면 나도 좀 용기내서 그 구역에 진입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 영상 속 그 분도 남잔데 여자 사람 친구랑 같이 갔으니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친구랑은 원래 서로 헬스장 가는 시간도 잘 맞지 않고 엄청 타이트하게 운동하는 친구라 늘 각자 하고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라 서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운동이 비슷한 시간에 끝난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공용 사우나로 가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며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답이 없는 걸 보니 이미 핸드폰은 어디 처박아 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씻고 가보자고 생각한 뒤 일단 샤워를 했다. 하필 오늘 샤워용 타월도 바디 타월이 아니라 작은 타월. 몸을 절반 밖에 가리지 못할 것 같아 급한대로 운동할 때 쓰는 타월로 몸을 휘감았다. 여기선 사우나 하는 공간을 웰니스라고 부르는데 여자 샤워실, 웰니스 공간으로부터 공용 웰니스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진 않았다. 열걸음이면 닿을 정도. 이미 가자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머릿 속은 하얘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왜 이렇게 긴장되지?'




진심으로 말하건대, 회사 면접도 이만큼 떨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오랫동안 가려고 생각해온 일이라고는 해도, 그걸 오늘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고, 너무나 충동적이지만, 왠지 친구가 있을 때가 아니면 또 이렇게 가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점점 사라져 가는 동안에도 나는 여자 웰니스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이러는 내가 이상한 거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가서 자연스럽게, 그래 그냥 사우나 하면 되지.'

'대체 뭐가 이렇게 긴장되지? 여자 목욕탕 가는 거랑 뭐가 달라?'




아무리 생각을 어르고 달래도,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 이 컬쳐쇼크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나보다. 여기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사람들은 나를 전혀 신경도 안쓸거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마치 패러글라이딩 출발 직전의 그 때 처럼 온 몸의 신경세포들이 쪼여들면서 극도로 긴장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가 더 바보같아 보여서 일단 스스로 엉덩이를 뻥 걷어찼다. 




'그냥 가. 이런 일에 쩔쩔매서야 앞으로 어떻게 니 일하면서 살래?'




결정타였다. 내가 스스로를 컨트롤 할 때 자주 써먹는 멘트다.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성큼성큼 공용 사우나 입구에 들어섰다. 

정면으로 보이는 사우나의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올누드로 앉아있었다. 

측면이라서 다행이었다. 

(근데 측면인데도 놀랬다. 분명 표정에 티가 났을 듯...)

사람이 있다.

그것도 남자가 둘이나.

으아아아아.

그대로 뒤로 돌아 다시 후퇴. 




'으아아아아 뭐하는거야.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여자 전용 사우나에 있다가 그냥 집에 가 ㅠㅠ...' 




스스로를 자책하며 포기 직전 단계까지 이르렀다. 





'아니야, 다시 한 번 이미지 트레이닝을 잘하고 가보자.' 




이번에는 미리 루트를 생각하고 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간다. 바로 습식 사우나 쪽으로 몸을 튼다. 수건을 둘 곳을 찾아서 수건을 놓은 뒤 바로 습식 사우나로 입장!

공용 웰니스 안에서 뇌가 멈추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목표를 정했다. 목표는 습식 사우나.

그렇게 계획을 짜고 가니 훨씬 쉬웠다. 

일단 수건으로 몸을 감은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들어갔다. 더 이상 후퇴는 없다!

정면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건식 사우나에서 또 당황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본 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몸짓으로 나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고 습식 사우나 문 앞에 섰다. 다행히 문 바로 옆에 수건을 거는 곳이 있었다. 




'너무 후다닥 거려도 이상할 거야.'




나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수건을 벗어서 걸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습식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 때문에 사람이 있는 것은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습식 사우나로 들어간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습식 사우나는 수증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밖에서 안이 잘 안보이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꽤 좁았다. 일단 자연스러운 척 "할로"라고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독일은 좁은 공간에 들어갈 때 안에 아는 사람이 없어도 이렇게 인사를 한다.) 뻘쭘해져서 천정을 바라보았지만 1초만에 맞은 편에 있는 사람을 스캔했다. 남자분이었고, 나의 입장에 적잖이 당황한 듯 했다. 여기는 혼성 사우나긴 하지만 실제로 여자가 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했다. 독일 문화권에서 자란 여자들이라 해도 혼성 사우나를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혼성 사우나를 가면 가기야 하겠지만 여성 전용 사우나가 있는 마당에 굳이(?) 라는 생각도 있을 것이고 아주 불편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진짜 이 남성분이 당황하는 걸 보니 여자가 오는 일이 드물긴 한가보다 생각했다. 부담스러워 하시길래 계속 천정만 바라보고 있었는데도 얼마 안있다가 바로 나가셨다. 인프피인 나는 괜히 '나 때문인가...'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만 나도 얼마 못있어서 또 누구와 마주칠까 무서워 얼른 나와서 여자 탈의실로 돌아왔다. 너무 긴장하고 떨어서 친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이미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역시 제대로 경험해보려면 수증기가 없는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 봤어야 했는데!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의 측면 누드만으로도 어질어질해서 엄두를 못냈다. 같이 간 사람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혼자는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언제쯤 또 도전해 볼 수 있을까? 어영부영하던 사이 지금은 공용 사우나는 커녕 사우나를 못 쓰거나 아니면 1명씩 밖에 못들어가는 상황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














*사우나의 문화는 나라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 커버 이미지: Photo by HUUM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겨울 나기의 필수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