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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17. 2022

독일 기차와 나, 누가 더 지각상습범일까?

독일에서 5년 살아봐야 다 소용없다




아주 오랜만에 함부르크를 떠나 작은 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바트 나우하임(Bad Nauheim)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도시. 시국도 시국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최근 2년간 한국 방문은 커녕 여행은 꿈도 꾸지 않고 살았었기에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기차 여행이었다. 함부르크에서 바트 나우하임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30분에서 5시간. 독일 기차는 같은 구간이라도 언제 표를 사느냐에 따라 기차표의 가격이 달라진다. 일주일 전쯤 구매하고, 반카드 25라는 독일 기차 할인권으로 할인 받아서 47유로, 한화로 약 6만원 정도를 결제했다. 반카드 25를 또 18유로에 샀으니 총 8만 4천원 정도를 낸 셈이다. 반카드 25는 독일 기차 도이치반(DB)의 정기 할인권 같은 개념이다. 연단위로 구매하면 해당 기간 동안 기차표를 좀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서 기차를 자주 타는 사람들이 이용하면 유용하다. 원래는 1년 단위이지만 마침 체험 기간 개념으로 3개월 동안 이용해볼 수 있어서 결제를 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4번 정도 기차표를 사면 본전은 뽑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가온 출발일 토요일 아침 6시.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준비를 마쳤다. 독일 기차역은 항상 혹시 모를 변수를 생각해 30분 전에 도착한다고 생각하고 가면 좋은데, 아슬아슬 도착하는 바람에 헐레벌떡 뛰었다. 그런데 나만 늦은 게 아니었다. 기차도 늦었다. 사실 시간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독일인들의 이미지에 비해 독일 기차는 상습 지각범으로 유명하다. (여담이지만 스위스가 기차들이 칼같기로 유명하다고도 들었다.)




늦었다면서 그 와중에 또 플랫폼 사진은 찍었다, 인프피의 감성은 소중하니까




기차는 예정 출발 시간보다 7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기차를 늦지 않게 탄 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환승 예상 시간이 6분 남짓 밖에 안되는 티켓이라 환승역인 기센(Gießen)역에서 다음 기차를 못 타게 될 확률이 높았다. 만약에 예정된 환승 기차를 못타게 될 경우 도이치반의 책임이기 때문에 다음 기차를 타면 되긴 했지만, 다음 기차를 타려면 그 역에서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환승역에서 전력을 다해 달릴 각오를 하고 기차가 1분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자주 DB앱(독일 기차앱)을 더 자주 열면서 예상 도착 시간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5분 늦게 도착할 거라고 했다가, 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가, 또 7분 늦을거라고 했다가, 12분 늦을거라고 했다가… 연착 공지가 1시간 안에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아니 대체 어쩌자는 건가!





이미 거기서부터 좀 불안한 냄새가 슬슬 나긴 했는데, 더 큰 문제가 터져버렸다. 예상 도착 시간도 수시로 바뀌고, 중간역 정차도 제법 길었던 구간이 있어서 나는 당연히 늦을 거라고 생각하고 맘 편히 다음 기차를 타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보여야할 중간 정차역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지도앱을 열어 현재 위치를 확인해 봤더니 목적지와 좀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렇게까지 둘러서 간다고?’ 뭔가 이상했다. 마침 어느 역에 도착하던 참이라 창 밖의 기차역 이름을 확인했는데 내가 탄 기차 노선에 없는 완전히 쌩뚱맞은 역 이름이 보였다. ‘뷔르츠부르크?!’ 놀란 토끼눈으로 내가 탄 기차의 노선을 확인해보니 아무리 눈씻고 찾아봐도 그런 이름은 보이질 않았다.





‘중간 정차역 이름이 생략될 수도 있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친 건가?’

‘뭐지??’



 아무래도 느낌이 쎄해서 가방을 들고 후다닥 출입구로 달려가 일단 기차에서 내렸다.



‘근데 만약 내가 일찍 내려버린거면 또 어떡하지?’

‘비—상—! 비——상——!’



머릿속에 자체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공이 확장되고 호흡이 가빠지고, 온 몸의 세포가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출동했다. 일단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주위에 물어봐야 했다. 주위에 승무원은 보이지 않았고 가까운 곳에 사람도 없었다. 다시 기차에 올라타 가까운 승객에게 이 기차가 기센역을 지나친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일단 고맙다고 하고 바로 뛰어내렸다. (뭔가 뒤에 더 설명을 해주시려는 듯 했는데 이제 슬슬 기차문이 닫힐 시점이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내리자마자 기차문이 닫혔다. 그 기차를 멍때리고 그대로 타고 있었으면 뮌헨까지 갈 뻔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두개 역만 더 갔으면 뮌헨이었다. 서둘러 뷔르츠부르크에서 바트나우하임까지 가는 기차표를 검색하니 2시간이나 걸렸다.



‘뭐라고? 2시간? 4시간 동안 달려서 이제 겨우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었는데 2시간을 더 가야한다고?!’



지도를 보니 이미 뷔르츠부르크까지 온 것 자체가 목적지에서 제법 멀리 온 것이었다. 허탈함과 황당함과 혼란스러움이 뒤죽박죽 섞여 머리도 마음도 엉망이 되었다. 일단은 당장 이 곳에서 바트 나우하임으로 가는 표부터 끊어야 했다. 15분 정도 뒤에 기차가 있었다. 이 기차를 놓치면 또 다음 기차까지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일단 DB앱으로 서둘러 표를 끊었다.



[-29.10유로]



4만원이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흑흑) 일단 티켓 구매는 완료. 다음은 기차를 기다리면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마술사의 카드 마술에 속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분명 도착 예정 시간 20분 전부터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쌩뚱맞게 뷔르츠부르크라니.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 라는 말만 머릿 속에 맴돌았다. 인프피라 감정이 먼저 발동하는 나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렸어야지!’

‘분명 뭔가 공지가 있었을텐데 내가 놓친 걸거야 ㅠㅠ’




다른 기차보다 이 기차 안내 방송 볼륨이 작아서 잘 안들리는 통에 정말 기차타는 내내 안내 방송을 좀 무시하긴 했었다. ‘잘 안들려도 잘 들었어야지!’ 스스로를 탓하고 또 탓하기를 30분 정도 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감정을 추스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도 반카드를 구매해둔 덕분에 기차표도 좀 더 저렴하게 구매했고, ‘그래 뮌헨까지 안가고 뷔르츠부르크에서 내린 게 어디야’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감정이 좀 진정이 되고나자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확인하기 위해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했다. Zugfinder라는 웹사이트에서 해당 기차의 전체 노선과 지연 히스토리를 볼 수 있었다. (독일 기차 이용하시는 분들은 꼭 미리 참고하시길! 이제 보니 늦는 기차는 그냥 맨날 늦는 것 같다…) 일단 내가 몇 정거장이나 지나친 건지 확인하려고 내가 탔던 기차의 노선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출발지부터 최종 도착지까지 아예 뷔르츠부르크의 이름이 없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기차가 중간에 둘로 갈라졌나? 독일은 그런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도 그런 경우에는 기차 노선에서 표시가 되는데, 이번엔 그런게 전혀 없었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정확한 이유를 몰라서 내일 기차회사에 문의 메일을 써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정답을(?) 찾았다.






나는 그냥 기차를 잘못 탄 것이었다







그렇다. 기차가 갈라진 것도 아니고 내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다른 기차를 잘못 탄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지금 다시 함부르크에서 뷔르츠부르크역으로 가는 기차를 검색해보니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었다. 아침에 기차역에 도착해서 역 중앙 전광판에 있는 내 기차 이름과 플랫폼은 확인했으나, 늦었다고 헐레벌떡 오는 바람에 막상 플랫폼에서 ‘지금’ 서있는 기차가 내 기차가 맞는지 확인하지 않고 바로 올라탔던 것. 나는 아슬아슬하게 왔지만, 내가 타야할 기차가 지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그 앞의 기차를 내가 타야할 기차로 착각하고 올라타버린 것이다.




이 때는 4시간 후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왜 가는 내내 눈치를 못챘는고 하니 하필 중간 정차역이 상당히 많이 겹치는 노선이어서 가는 내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고, 검표원이 기차표도 2번이나 검사했기 때문에 뭔가 잘못됐다면 검표원이 말을 했겠거니 생각해서 기차를 잘못 탔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다. 검표원은 왜 내 표를 두번이나 오케이했을까? 그건 아마도 내 티켓이 모바일 QR코드 티켓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이 QR코드를 찍었을 때 어떤 정보를 보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검표원은 내가 제대로된 기차에 탄 건지 보다는 내가 들고 있는 이 표가 내가 기차를 탄 역부터 표를 검사하는 역 구간 사이에 유효한 표인지만 확인을 하는 것 같다. 앞에 말한 것처럼 중간 정차역이 겹치다보니 중간 역에서 검표하는 검표원 입장에서 나는 어쨌든 내야할 돈 내고 그 구간을 지나가고 있는 승객으로 인정되었던 모양.





6시간 30분 걸려 도착한 바트 나우하임






토요일 아침 8시 30분쯤 함부르크 기차역을 떠나 바트 나우하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작은 실수 하나로 결국 나는 1박 2일 여행 중 첫째날의 약 7시간을 기차와 기차역에서 보내야 했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독일에서 5년 살아봐야 아무 의미없구나.’ 허탈함이 밀려왔다. 앞으로 이런 실수는 절대 안하겠지? 세포들이 열심히 오늘 얻은 교훈을 메모장에 적었다.



- 기차탈 때는 아무리 출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타야하는 기차가 맞는지 기차 번호 더블체크 ‘꼭’ 할 것.

- 만약 이번처럼 허둥지둥 타느라 못했다면 기차번호는 기차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꼭 하고(!) 그것도 모르겠다면 검표원에게 내가 기차 제대로 탄 거 맞는지 한 번이라도 물어볼 것.

- 무엇보다 여유있게 기차역에 30분 전에 도착할 것…




제발 좀 일찍 일찍 다니자(!)





+) 참고로 저는 한국에서 기차탈 때 1분 전에 도착하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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