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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02. 2019

이력서를 쓰다 지친 그대에게




'이력서', '커버레터'



이 두 가지를 쓰는 일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귀찮고 싫다. 살면서 해온 일중에 세상에 이렇게나 손에 안 잡히는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독일로 무작정 날아온 이 백수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이력서를 쓴다. 하지만 진도나가는 속도가 거북이 걸음보다 열배는 더 느린 것 같다.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브런치 앱을 열어 검색창으로 들어가 동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

⎜력

⎜서




세 글자를 넣은 뒤 검색을 눌렀다. 늘 추천글만 보았는데 브런치에서 직접 검색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브런치라면, 분명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대신 써준 글이 있을 것이다.' 




마치 마지막 희망처럼, 검색 버튼을 눌렀다. 키워드가 키워드인지라 이력서에 관한 글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주로 '이력서를 잘 쓰는 팁'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구글에서 진저리 날만큼 읽고 또 읽은 내용들이 다시 한글로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처럼 이력서를 쓰는, 아니 - 창작 - 하는 고통에 머리를 쥐어뜯는 심정을 토로하는 글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있어도 리스트의 맨 뒷부분에 밀려있었으려나. 하지만 너무 지친 나는 리스트의 끝에 끝까지 탐험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력서야말로 경쟁이 고도화된 이 사회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사회는 요구한다. 




'이력서를 제출하세요.' 



그리고 뒤에 붙는 여러 가지 회사나 기관이 요구하는 조건들. 뒤에 붙는 요란한 설명들 때문에 누구에게나 이력서는 당연히 준비돼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렇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서로 간에 약속된 그 종이. 

그 분량과 형식도 언뜻 보기엔 어렵지 않다. 짧으면 1장, 길어야 2-3장. 시대가 갈수록 형식은 조금씩 바뀌고 있고, 그걸 조금이라도 더 잘 쓰기 위한 스킬들도 개발되고 있지만, 어쨌든 기본 양식은 비슷하다. 얼핏 보면, 그냥 내 신상 정보와 내가 졸업한 학교, 다닌 회사, 일을 있는 그대로 적어 넣으면 그만일 것 같다. 그래서 참 쉬워 보인다. 하지만 정작 노트북을 열고 내 개인 정보를 다 입력하고, 그간 다녔던 학교, 회사 등의 이름과 기간을 입력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진짜 어려운 난관들이 남아있다. 너무너무 쓰기 싫고 멋모르던 시기에는 요약도 너무 지나친 요약을 해서 몇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봐도 성의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대충 쓴 이력서도 있었다. 





우리를 (아니 나만 그런가...) 어렵게 하는 난관들은 대략 이렇다.





- 첫 번째 퀘스트: 각 회사에서 내가 했던 일들 기록

   : 예전에는 내가 했던 일들을 심심한 어투로 기록하기만 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 이력서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튀기 위해서 내가 했던 일과 그 일의 대표적인 성과를 적는다. 성과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성과가 없었다면 골치가 아프다. 하지만 정작 뒤돌아보면, 내가 냈던 성과가 과연 정말 나의 힘으로 된 것이었는지, 성과가 없었던 그 일은 정말 내 능력이 부족해서였는지 혼란스러워지기까지 한다. 



- 두 번째 퀘스트: 나를 표현하는 짧은 설명글 요약 (약 4~5줄 정도?) 

  : 예전에는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요즘에는 이력서에도 서술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짧은 글을 넣는 추세라고 한다. 이력서의 요약이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제 사례가 아닙니다...)




'Highly capable product manager with 6+ years of experience, seeking to leverage proven leadership and strategy skills to grow revenue at Eskelund Global. Met 150% of revenue goal in a fast-paced tech firm. Led 7 cross-functional teams to 25% efficiency improvement and $1.2M cost savings.'

(출처: zety.com)




이걸 생각하는데만 해도 하루는 넘게 걸린 것 같다. 이 몇 줄 때문에!




- 외국어 스킬 


아... 이 부분은 매년 크게 업데이트되지 않고 반복해서 쓰는 건데도, 매번 이력서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회의감과 자괴감이 든다. 해가 갈수록 쓰지 않는 외국어는 퇴화하는 기분이 들고, 그렇다고 영 초보는 아닌데, Fluent라고 하기는 좀 모자란 것 같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포장하는 그 단계는 대체 그 어드메일까. 스스로 내 실력을 평가하자면 너무 겸손할까 두렵고, 누군가에게 물어보자니 너무 냉정할까 두렵고, 취준생 시절 영어 점수 딴다고 쏟아부은 돈이 한두 푼이 아니라 또 그렇게 하긴 싫고, 그런 건 그냥 종이 쪼가리 같고. 





- 스킬


영어 이력서라 그런가. 

Soft skills, Hard skills 이런 걸 적으라고 하는데, 이것도 그냥 있는 그대로 쓰면 될 것 같은데 묘-하게 고민이 된다. 

Hard skills는 '파워포인트'나 '포토샵'처럼 업무를 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꼭 필요한 스킬이고, Soft skills는 '시간 관리', '분석 능력'과 같은 개인의 기량에 따라 달라지는 뭔가 보조 스킬 같은 느낌이다. 이것도 왜 이렇게 어려운지.  있는 그대로 쓰자니 너무 평범해 보이고, 차별화를 하자니 너무 과대포장을 하는 기분이 들고. 





그냥 나의 우유부단함이 모든 걸 어렵게 만드는 것뿐인 걸까(!)

하지만 어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경력이 쌓이다보니 어느 날에는 내가 누군가의 이력서를 검토하게 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치 추리 게임을 하듯이 그 종이에 빼곡히 들어선 텍스트들을 단서로 이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우리가 찾는 포지션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빠르게 매칭시켰다. 그 중에는 분명 너무 고리타분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기 싫은 이력서도 있었고,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되있어서 물흐르듯 읽어내려가게 되는 이력서도 있었다. 중요하단 말이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지만, 어디까지나 이력서를 제출하는 입장에서는 검토하는 입장을 100% 이해할 수 없다. 그러던 것이 직접 이력서를 검토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나라는 사람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인상 깊게 드러내야 하는 내 인생의 경험과 배움의 축소판. 

어쩌면 내 인생의 기로를 바꿀 수도 있는 이 종이 한 장. 





그래, 결국 이력서는 중요하다. 중요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이력서를 쓰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자괴감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의 포장은 중요하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 깔끔히 씻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나가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단순한 이력이 아닌 '성과'까지 넣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나는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무엇을 했나'와 같은 자괴감이라는 불씨가 바삭바삭하게 마른 멘탈 지푸라기에 붙으면 이력서를 쓰다 말고 인생을 한탄하고 앉아있다. 에잇.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내 마음속 에고의 가장 큰 외침은 이거다.





'기껏해야 2-3장짜리 쓰는 건데 왜 며칠이 지나도록 아니 일주일이 넘도록, 아니 더 지났나? 아무튼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이 멍충아!' 




그래도 브런치에서 찾은 이력서 쓰는 팁을 올려주신 어느 분의 글에, 살아온 삶을 넣는 이력서를 쓰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라는 그 한마디가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이력서 쓰는 게 막힐 때마다 계속 이 말을 되새긴다. 






있는 그대로 쓰자. 있는 그대로.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도 괜찮은 사람이다.






아마도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뛰어난' 사례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력서를 쓰다 지쳤다면, 잠시 쉬어보자. 그리고 잊지 말자. 당신은 더 부풀리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대로도 참 괜찮은 사람이다.











ps1. 독일어 이력서가 아닌 게 어딘가, 영어라서 다행이다. 

ps2. ...라고 이 글을 쓰면서 오늘도 또 이력서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히.









글쓴이

필명 노이. 

30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쓰려고 독일에 왔다가, 독일이 너무 좋아서 2년째 거주 중입니다.

탈회사원을 선언한 뒤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글 쓰고, 영상 찍고, 구매대행 일을 하고 있어요.

구매대행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 마음에 드는 것들만 올려두고 있으니 구경 오세요. :)

- 구매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커버 이미지: Photo by JESHOOTS.CO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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