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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20. 2019

우리의 마음은 연못과 같아서

유럽에서 제일 큰 재패니즈 가든에 홀로 앉아서 끄적이는 단상





어제는 함부르크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가끔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센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실내가 더 갑갑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밖에서 춥지 않게 모자가 달린 겨울 패딩을 입고 나왔다. 3월부터 함부르크의 한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늘 옷을 껴입던 집에 있는 것보다 마음 놓고 따뜻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좋은데, 가끔은 너무 따뜻해서 나에겐 좀 더웠다. (추위도 잘 타고 더위도 잘 타는 까다로운 몸뚱이...) 아무래도 밖이 추우니 평소보다 실내 온도를 더 높인 듯했다. 겨울에는 푸근한 겨울 원피스 입는 걸 좋아하는데 여름옷을 입어야 기온이 맞을 정도로 이 곳 실내 온도는 (내 기준으로) 꽤 높은 편이다. 6시쯤 일을 다 끝내고 바로 옆에 있는 헬스장으로 갔다. 원래 다니던 헬스장 바로 옆에 코워킹 플레이스가 생겨서 요즘 말 그대로 완전 꿀을 빨고 있다. 이동거리가 짧아지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운동은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지만 보통 근력 운동이나 요가를 하는데, 4월과 5월은 걸어 다닐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아서 오늘부터는 걷기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건물 길 건너편의 공원이 생각났다. 이 헬스장을 다닌지도 거의 1년이 다되어가면서도 바로 앞의 공원에서 운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많았던 날씨 좋은 날들 중에서도 나는 잔디밭에 드러눕기만 했지 운동 목적으로 걷거나 뛰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공원은 아주 크고 함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공원이다.) 




마침 머리도 좀 비우고 싶고, 애매한 더위를 참고 일하느라 벌게진 얼굴을 식힐 겸 오늘은 날씨가 아주 흐리고 바람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원에서 걷고 뛰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일단 옷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야외용으로 상의에 걸칠 옷은 안 가져왔던지라, 일단 임시로 운동복 위에 패딩을 입고 걷기 시작했다. 모든 짐을 다 헬스장 락커에 두고 가볍게 몸만 나오니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마음은 가볍고 기분도 좋았다. 왜 진작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자연과 사우나를 이렇게 가깝게 즐길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헬스장은 어디를 가도 흔하진 않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아이폰도 두고 나왔다. 지갑에 든 건 헬스장 카드키와 물병 하나. 평소에 가고 싶었지만 시간적 여유, 아니 어쩌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가보지 못했던 공원 안의 'Japanese Garden(일본식 정원)'에 가보기로 했다. 공원이 워낙 커서 한 번에 다 둘러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가던 길만 가느라 2년 간 한 번도 저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처음 가는 길을 표지판을 따라 걸어갔다. 아이폰을 들고 나왔다면 분명 구글 지도 맵에 의존했겠지,라고 생각하며 걷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길을 걷다 보니 Japanse Garden을 가리키던 표지판이 갑자기 사라졌고, 주위를 둘러봐도 (내 눈에는) 일본식의 정원이 보이지도 않았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에이, 언제 내가 계획대로만 걸었나.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자.'며 근처의 풍경을 즐기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걸어 들어갔는데 이게 웬걸. 한 열 발자국 더 걸으니 그 일본식 정원이 코 앞에 있었다. 딱히 무어라 세워진 간판 같은 것이 없어서 몰랐는데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었다. 





본문 사진들은 작년에 동생이 찍은 사진을 협찬(?) 받았다



독일 공원 속 일본 정원




정원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본식 정원을 잘 표현해놓았다. 건축이나 정원 디자인 같은 건 잘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나름 일본어과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합격점을 줄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재패니즈 가든의 바로 옆은 역과 역을 연결하는 길목이 있어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걸어갔다. 공원이 크고 중심가에 있다 보니 이쪽 역과 저쪽 역에 다 걸쳐져 있어서 출퇴근 유동 인구수가 제법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찬 바람에 온 몸을 싸매고 집으로 가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일본식 정원은 유럽에 있는 일본식 정원중에는 그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왼쪽으로 길게 늘어진 길목 옆으로는 바로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연못을 앞에 두고 일본식으로 지어진 집이 하나, 앞으로 조금 뻗어 나온 나무 평상과 함께 공원의 중심을 지켰다. 건물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식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티하우스라고 한다. 날이 좋은 시기에 많은 이벤트들을 하는 모양이다. 










식물원을 가지고 있는 공원답게, 일본식 정원에는 일본이나 동아시아산 나무나 식물들로 꾸며져 있어 그 분위기를 더했다. 티하우스를 향해 난 돌길을 따라 들어갔다. 건물의 연못 방향 끝에 한 남자가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뒤쪽에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퇴근길에 잠깐 힐링을 하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연못 쪽으로 건물을 돌아 들어가자 남자는 이내 자리를 떴다. 괜히 내가 분위기를 깬 건 아닌가 미안하면서도, 이제는 내가 즐기라고 바통 터치를 해주고 간 것 같아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바로 아래 연못 물이 비치는 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돌에 닿는 허벅지 안쪽 부분이 차가워졌다. 





나,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걷는 것을 멈추고 연못 앞에 눈을 감고 앉아있으려니 주위의 소리들이 더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웅성이는 수다 소리, 왼쪽으로는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들이 들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바람이 웅웅거렸다. 그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푸드덕푸드덕'하는 소리가 들려 번쩍 눈을 떴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왼쪽 대각선의 나무를 향해 날아가면서 내는 날갯짓 소리였다. 아마 지붕에 앉아있었던 모양이다. 티비나 동물원에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이라 뭔가 설레었다. 푸드덕 소리를 내며 힘차게 날던 비둘기의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그러고 보니 비둘기 하면 날개에 기름때가 묻어 깃털이 마치 한 달 넘게 감지 않은 머리처럼 뭉쳐있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녀 뭔가 더럽고 피해야 할 것 같은 이미지만 강했는데, 이렇게 공원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보니 결국 그런 이미지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연못에 비치는 달, 타인에게 비치는 나





가진 거라고는 물병과 카드키 밖에 없으니 자꾸 주위를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때가 저녁 6시 30분 정도였던가. 어느새 해가 지고 아직 보름달이 되려면 일주일 정도 남은 것 같은 둥그런 달이 벌써 하늘에 떠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잔잔한 연못 위에 비쳤을 달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쉬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연못 위에 비친 달의 모습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그 모양이 일그러지고 잘게 쪼개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요동치는 수면의 파동 위에서 힘차게 회오리 치는 노란 에너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바라보다가도 고개를 들어 하늘 위의 달을 바라보면 달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하늘에 떠있는 달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면, 바람이 요동치는 연못 위에 비친 달은 타인에게 비치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 자신은 하늘에 떠있는 달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 각각은 모두 마음에 하나씩 연못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러면 나는 그저 그들의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이 사람에게는 저렇게, 저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럴 때는 저렇게, 저럴 때는 이렇게 비친다. 그들의 연못의 상태에 따라서 내가 비치는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고 편안한 연못을 가진 사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춰준다. 연못 위에 이것저것 연꽃도 많이 심어놓고 배도 많이 띄워놓은 사람의 연못에는 내가 비치지 않기도 한다. 보통은 내가 비치긴 하지만 마음의 연못에 바람이 불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서, 그들의 마음에 부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거기에 비치는 내 모습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비친 내 모습이 어떤지 이야기를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들이 말하는 내 모습이 어딘가 닮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연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도 연못이 있고, 거기에 내가 비친다. 내 마음에 불안과 걱정이 많아 바람이 많이 불수록 연못은 일그러져 나는 나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명상을 하고 마음 챙김을 계속 계속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햇빛과 바람은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아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딱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르는데 그것을 메모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에는 펜과 노트라도 들고 나와야지. 그래서 잊어버리지 않게 세 가지 키워드를 열심히 외웠다. '새', '달', 그리고 마지막은 '바람'이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아마 다들 한 번쯤은 읽어봤을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어느 유명한 작가의 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교 최초 경전에 나온 구절이었다. 아무튼 이 문장들은 간결하면서도 마음에 울림을 주는 힘이 있는데 나는 그중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든다. 


바람은 그 실체가 없다. 형체도 없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고, 오로지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커다란 나무를 왼쪽 오른쪽 춤을 추게 만들고, 잔잔한 연못 위를 멋지게 슬라이딩하는 듯 화려한 물결의 파장을 일으키고, 내 머리카락을 흔들고 피부에 닿으면 그 때야 나는 알게 된다. 


'바람이구나.' 하고. 


처음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는, 사회의 규율, 타인의 시선 같은 것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 날 연못에 앉아 바람 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는 조금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이건 오롯이 나만의 해석이지만 '그물'이라는 건 인간 사회를 살게 되면서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그물처럼 얽힌 '인간관계'를 뜻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그동안 배운 내용과 조금 조합해보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는 건 어떤 관계에도 끄달리지 않고 내 삶을 산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상대의 기대도 정중하게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기대를 하지 않고 산다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지금은 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관계가 얼마나 편안한지 말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흐린 함부르크 공원의, 

단아한 일본 정원에서의 단상,

끝.






ps. 돌아오는 길은 달려서 돌아왔다. 걷고, 사색하고, 뛰고 돌아와 헬스장에서 복근 운동하고, 샤워하고, 사우나하고 마무리. 아, 너무 좋다. 이런 저녁.






글쓴이

필명 노이. 

30살이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쓰려고 독일에 왔다가, 독일이 너무 좋아서 2년째 거주 중입니다.

탈회사원을 선언한 뒤 먹고살기 위해 독일에서 글 쓰고, 영상 찍고, 구매대행 일을 하고 있어요.

구매대행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 마음에 드는 것들만 올려두고 있으니 구경 오세요. :)

- 구매대행 블로그: https://lifeisllll.blog.me

- 커버 이미지: Planten un Blomen 공원 홈페이지 

- 본문 사진: 동생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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