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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Oct 30. 2019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꿈

더 많이 실패한다는 것의 의미


요즘 들어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일 저녁이 되면 Health 앱을 열어 오늘 하루 총 몇 걸음을 걸었는지 체크한다. 최근 무리한 목표를 세우는 바람에 하루 8시간씩 책상에 앉아있었더니 한 순간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이 왔었다. 아, 역시 이제 방심하면 안 되는 나이구나. 운동을 매일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하루에 5 천보 이상은 걸어야 한다는 혼자만의 목표를 세웠다. 어딘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집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는 날엔 일부러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다행히 집 근처에 작지만 직선으로 기다란 공원이 있어 멀리 가긴 귀찮고 걷고는 싶을 때 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여름이 끝나면 구름 구름, 흐림 흐림이 일상인 함부르크지만 그 날은 마침 날씨도 꽤 좋았다. 차지만 기분 좋은 그런 바람을 피부 위로 느끼면서 어느새 참 예뻤던 단풍잎들이 다 떨어져 버린 나무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 분명 지난주까지 온 몸이 빨갛게 물든 이 작은 나무들이 참 예쁘다고 나름 신중한 손길로 사진을 찍어서 가족들에게도 보내주었었는데, 지금은 다섯 손가락을 다 접지 않아도 셀 수 있을 만큼만 남아있었다. 











이제 잎이 몇 장 남지 않은 나무들을 지나가면 오른쪽으로는 키가 훨씬 큰 나무들이 나오는데 그중 한 나무가 열심히 여기저기로 무언가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생긴 것이 신기해서 눈여겨보던 나무였는데, 손가락 반 마디 정도 크기의 씨앗 혹은 열매 같은 것을 감싼 잎이 마치 작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게 펼쳐져서 이 녀석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는 동그랗게 팔랑팔랑 팽이가 돌 듯 회전을 하면서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 더 멀리 날려 보내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이다. 이것들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 날 유독 눈에 띄었던 이유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인지 유난히 많은 씨앗이 떨어져 있었고, 하필 그게 아스팔트 위인 데다 사람들이 늘 지나다니는 좁은 길이라 모처럼 뿌려진 씨앗들이 대부분 와그작와그작 짓밟혀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흩뿌려져 있어 피해 갈 수도 없어 나도 몇 개를 와그작 와그작 밟고 지나가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밟히고 짓이겨진 씨앗들을 바라보았다. 이것 또한 로드킬이 아닌가. 만약 여기가 아스팔트로 뒤덮이기 이전의 흙길이었다면 이 아이들은 이렇게까지 빨리 희망을 놓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싹을 틔우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발버둥 쳐 볼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의 발에 밟혀 으깨어진 수많은 그 씨앗 혹은 열매 위로 그동안 수없이 무너져 내렸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무도 이렇게 많은 실패를 낳는구나. 이렇게 많이 날려 보낸 씨앗들이 양지바른 흙 위에 자리 잡을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으깨어질지는 나무도 모르지만, 이 아스팔트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씨앗을 밟고 지나갔는지도 나무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나무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늘 가을이 되면 이 씨앗들을 날려 보내겠지. 차라리 모르고 싶다. 나무처럼. 내가 뿌린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나도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보아도 보지 않은 것처럼,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나도 흔들림 없이 매해 내가 가꾼 씨앗들을 어딘가에 심는 인생을 살아가야겠지. 




잠시 쓸쓸해졌던 생각의 터널을 지나자 조금 밝은 빛도 보였다. 


그래, 그래도 이 나무가 큰 나무라서 이렇게 밟히고 부서져도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희망을 담은 씨앗들을 이렇게나 많이 뿌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많은 씨앗이 실패했다는 건, 많은 씨앗을 뿌릴 수 있을 만큼 큰 나무라는 의미이고, 많은 씨앗이 실패하였어도 내년에 그만큼 또 많은 씨앗을 키워낼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나무는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이렇게나 많이 실패하였어도, 실패를 거듭할수록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가 아니라 '나는 더 커다란 나무로 자라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기억해두길 바란다. 

더 많이 실패할수록, 우린 더 큰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씨앗은 양지바른 흙 위에 자리를 잡고 예쁜 싹을 피우고 쑥쑥 자라나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함께 모여 숲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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