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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an 16. 2020

내 사랑니는 결국 아팠다









내 사랑니는 결국 아팠다




나는 사랑니가 없을 줄 알았지만 있었고, 안 아파서 안 뽑을 줄 알았지만 결국 문제가 되었고, 그래서 일주일 전 매복 사랑니를 뽑았다. 오늘은 실밥을 풀러 가는 날이었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그 실밥의 끄트머리로 추정되는 것이 혀끝에 스칠 때마다 마치 만지면 안 될 것을 만진 것처럼 찝찝했다. 더 큰 문제는 처방받은 약을 다 먹고도 얼얼한 오른쪽 턱 아래와 두통이었다. 작년에도 반대쪽에 누워있는 사랑니를 같은 병원에서 뽑았지만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그때처럼 별로 아프지 않을 줄로만 생각하고 방심했는데, 마치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이번 통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람쥐 볼때기처럼 팅팅 붓고, 시퍼렇게 멍도 들었다. 그래도 치과 의사 선생님은 참 친절하고, 간호사도 친절했다. 실밥을 풀고 스케일링을 하기 위해 치과 의자에 가만히 누워 친절한 간호사분의 케어를 받는 동안 문득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돈 만원을 걱정할 필요 없이 스케일링을 받을 수 있는 시민이라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의사 선생님은 남은 통증은 일주일만 더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3일 치 약을 더 처방해주었다. 근육이완제까지 더 추가된 새 약을 받아서 나오면서, 아마도 지난번에 안 아팠던 것만큼 이번에 몰아서 다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니는 결국 나를 피해 가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인생에 사랑니 같은 또 다른 존재들이 떠올랐다.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이 꽤 깊은 자국을 남기며 내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래도 그중에 정말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말이다. 나이가 든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사랑니처럼 아니 그보다 더 아파해야 할 일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그래도 그 순간에 나와 함께 치킨을 먹어주는 동생이 있다면 덜 아프고 덜 힘들 것 같다. 





추신. 지금은 잘 자고 있는 내 동생아, 치킨값 만원은 카뱅으로 보냈다.












#나머지 잔상 기록


- 건강 검진 시기를 놓쳤더라도 다음 해에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작년에 검진을 받아야 했었는데 시기를 놓쳤다. 혹시나 해서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해서 상담을 했더니 작년에 검진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면 올해 받을 수 있도록 등록을 해주신다고 해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친절한 상담원님 감사합니다.


- 추가로 CT 검사를 받으려고 하는데 머리, 가슴, 허리, 목 중 어디를 받아야 할까. 다 받고 싶은데 하나만 골라야 된다고 한다. 흠.


- 우리은행 어플에 들어가면 ‘전체 메뉴-우리 오픈뱅킹’이라는 메뉴가 있는데, 이 메뉴는 내가 동의하면 내 주민번호로 만들어진 모든 다른 은행의 계좌까지 다 볼 수 있고 기본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이다. 이게 좋았던 이유는, 내가 ‘잊고 있었던’ 계좌를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심지어 그 계좌에 꽤 목돈이 들어있었다는 사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 휴면계좌로 전환이 돼서 그런지 오픈뱅킹으로 등록은 할 수 없었다. 그 길로 신분증 들고 은행 하나하나 다 찾아가서 휴면 계좌 해지시키고 잠자던 돈들을 끌어모았다. (꿀이득)


- ‘폼볼’이라는 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소재의 장난감 인형 같은 것으로 손으로 만지작 거리거나 벽에 집어던지거나 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 지금 종로 롤파크에는 리그 오브 레전드 1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었다.) 아티스트 10인과 합작하여 각양각색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꽤 만족스러웠다. 유년 시절 god 이후로 나는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요즘은 롤과 겨울왕국이 god만큼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점점 뚜렷해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기분 중 하나인 걸까. 왜냐면 더 젊었을 때의 나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아서 한 가지를 끈질기게 좋아하지 못했고, 그래서 무언가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기분, 꽤 좋은데? 


- 나이가 들어가는 이 기분이 나는 생각보다 꽤 좋은 것 같다.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물론 힘든 부분도 있다. 특히나 점점 더 선명해지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나라는 사람의 캐릭터와 인생이 더 분명해질수록 그것이 때로는 누군가와의 거리감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욕심내지 않는다. 꽤 행복하다. 서른이 되는 것도 멋졌는데 삼십대 중반이 되는 건 더 멋지네.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일기 마니아 결심 작심삼일 15일 차’ 일기를 읽은 직후였다. 그 아래 아래였던가, 다음으로는 '독일에는 소비 포기 운동이 있다?’라는 주제의 포스팅을 읽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내 피드에 떴나 생각해보니 #독일이라는 해시태그를 팔로우해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좋아서 이 분 계정을 팔로우를 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그분의 피드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계정이었고, 그러던 차 무심코 클릭한 ‘글을 쓰고 싶다면’이라는 책 리뷰 포스팅을 보았다. 


“이 책이 당신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 모두 안에 깃든 천재성을 해방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문장에 매료되어 그분이 분홍빛 형광펜으로 칠한 부분을 나도 같이 따라 읽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올해는 일기 마니아가 되겠다던, 그렇지만 작심삼일을 15일째 하고 있다는 친구가 번뜩 떠올랐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친구에게 그 내용을 공유하였다. 나는 그저 밑줄 친 부분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리라 생각한 것인데, 친구는 선뜻 그 책의 양장본을 구매하겠다고 했다. 좋아요가 315개가 달린 그 포스팅 하나는 누군가의 책을 하나 팔았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감을 선물하였으며, 또 누군가를 당장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내가 오랜만에 이 곳에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한때는 나도 내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남겨두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아니 그것과는 상관없이 문득 지금 당장 무언가를 써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 동생과 동생의 남자 친구와 함께 셋이서 둘러앉아 치킨을 먹으면서 나눴던 오늘 하루 내 사소한 일상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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