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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20. 2020

사재기 고객들에게 보내는
독일 마트의 숨은 메시지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갑작스러운 코로나 19 상황의 악화에 대한 독일 정부의 허술한 대처와 인종 차별이 점점 늘어나고, 사재기가 만연하는 독일 사회 분위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에 독일에 있는 것을 다소 비관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비록 그 마음을 잘 다스리긴 하였으나) 조금 과장해서 내가 이런 나라에 살려고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 정도로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 우연하게도 작지만 따듯한 일을 겪고 또 그런 장면을 마주하면서 생각이 다시 바뀌고 있다. 





사재기 고객들에게 보내는 독일 마트의 숨은 메시지



오늘 아침에 웬일로 아침 시간에 여유가 생겨서 몇 가지 장을 보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로 갔다. 함부르크에 사재기 현상이 일어난 이후로 이 마트를 가보는 게 처음이라 마트가 어떤 모습일지 내심 궁금했다. 마트 초입의 야채 과일 코너에는 이미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망고를 하나 샀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휴지 대란이야 일찌감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고 어차피 내가 휴지를 안 쓰기에 큰 타격이 없었지만, 내가 사려고 했던 주방 세제, 비건 소시지, 내가 좋아하는 칠리맛 피클 등 그 몇 가지 안 되는 식료품이 재고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탈탈 털려 있었다. 내가 필요한 건, 그냥 그것들 하나씩을 사는 것뿐이었는데. 막상 내 일이 되자 뉴스로 지켜보던 것보다 더 화가 나긴 했다. 그러던 중 마트에서 사재기 품목 코너에 붙여놓은 공지글을 보게 되었다. 여느 마트처럼 '해당 품목은 높은 수요로 인해 현재 품절입니다. 재공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블라블라~' 같은 식상한 멘트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굉장히 울림을 주는 메시지였다.




간단히 번역을 하자면 이렇다.


친애하는 이웃 여러분! (고객이 아니라 이웃이라고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 마트는 계속 문을 열 것입니다. (마트도 갑자기 닫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 모두를 위해 충분한 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빈 선반이 다시 채워질 거라는 뜻)
- 사회적 거리는 '사회적 차가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가 적절하다!)
- 여러분도 도울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방지를 위한 규칙을 잘 준수하라는 내용)



그리고 사실 이 마트 공지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메시지들의 타이틀만 읽어보면 간접적으로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마트는 계속 문을 열 것이고, 언제든지 충분한 양이 있고, 사회적 거리를 두라고 해서 네 생각만 하지 말고, 서로 좀 돕고 살자. 지금 정말로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 개인적으로 왜 마트들이 사재기를 제한하지 않는지는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병원에 침입해서 마스크를 훔친 사례도 있다는데, 불안에 떠는 사람들에게 먹을 걸 못 사게 하면 거기에서 오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이려나. (아시는 분 공유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아무튼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마트는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은근슬쩍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게 아닐까 싶다. 덕분에 화가 났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인종차별의 두려움을 버리고 나눔을 택하다


이제 집에 가려고 계산대로 갔는데 캐셔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웬 손수건을 콧등까지 올려서 입을 막고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아침이라 오픈 준비도 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고, 정신이 없어 죽겠는데 손수건까지 얼마나 답답할지. 표정에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게 팍팍 느껴졌다. 독일은 오프라인에서는 마스크를 살 수가 없고 온라인에서는 찾는다 해도 가격이 한국의 몇 배 이상이다. KF94급 마스크를 사려면 잘 사야 1장에 만원~만 오천 원에 보통 2만 5천 원씩 한다. 그마저도 지금 남아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계산을 하고 마트를 나섰지만 집에 가는 내내 마음이 찝찝했다. 집에 있는 마스크를 나눠드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KF94급은 되지 않는 일반 마스크지만, 그것도 비말 감염 예방에는 도움이 될 터. 아니, 심리적으로라도 엄청 도움이 될 것 같다. 상상을 해보시라. 유럽 손님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마트에 장을 보러 온다. 안에서도 쓰지 않는다. 당연히 계산대에서도 쓰지 않는다. 독일 마트에 셀프 계산이 없지는 않지만 대형 마트조차도 셀프 계산대는 전체 계산대의 10분의 1 정도이고, 그마저도 이렇게 작은 마트에는 셀프 계산대조차 없는 현실이다. 사회적으로도 모두 서로 가능한 1.5m~2m 거리를  두라고 하는 마당에 이 분은 오늘 근무 시간 동안 종일 코 앞에 서있는 손님들을 마스크도 없이 상대해야 하고, 그들이 집은 물건을 다시 집어서 계산을 해야 한다. 어우, 나 같으면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집에 가서 손을 씻은 뒤에 지퍼백에 비닐장갑과 마스크 2개를 넣었다. 혹시나 내 설명이 서툴러 오해를 살까 싶어 손편지도 썼다. 그분은 평소에 나랑 얼굴이 익을 정도로 자주 본 캐셔이지만 서로 웃으며 대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내심 속으로 동양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평소에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요즘은 워낙 인종 차별이 많아져서 아직 안 겪어본 나도 매번 가슴이 졸이는 것이 사실이다. '동양 사람이 줬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막 무섭게 화내면 어떡하지?' 별별 걱정을 다하면서 마트로 갔다. 10분 정도 기다리는데도 계속 줄이 끊기지 않길래 다음 차례 계산하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스크를 드렸다. 긴장해서 내가 뭐라고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마스크라고 설명해 줬더니 내게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주며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하며 마스크를 받아줬다.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이 많아 그렇게 짧은 인사만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이 일 때문에 오늘 하루 일정이 30분씩 다 밀렸지만, 그래도 마음은 따뜻했다.





드디어 행동하기 시작한 '진짜' 시민들



이때 오랜만에 심심해서 브이로그 식으로 마스크 주러 가기 전부터 셀프 독백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마스크를 주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다. 오늘은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쓰레기차가 와서 집집마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을 향해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집 발코니에서 아주 크~~~~~게 박수를 치면서 '브라보!', '브라보!'를 외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꼬마 아이가 엄마 옆에 붙어서 환경미화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쓰레기차가 집 앞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데도 끝까지 박수를 치면서 '당케슌! 당케!'를 외치던 아주머니.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을 하면서 나중에 독일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며칠 전쯤부터 이 시기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고맙다고 말해주기 캠페인 같은 게 시작됐다고 했다. 어제저녁 9시에는 사람들이 다 같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집에서 박수를 쳤다고!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소리는 안 들렸지만) 

친구의 말로는 사재기를 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일부 독일 사람들의 이 모습이 독일인답지 않다고는 했다. 이건 모두 요즘 사람들이 너무 약해 빠져서 그런 것이라며 이런 현상이 자기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그들을 머론이라고(ㅋㅋ) 신랄하게 비판했다. (역시 넌 베프) 

내가 많이 의지하고 지내던 독일인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는 것도 고맙고, 무엇보다 불안에 휩싸여 분위기가 180도 뒤바껴버린 사회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작지만 이런 캠페인을 하는 사람들, 또 따뜻한 메시지를 서로 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함부르크의 모습이 아직 남아있구나,라고.



이런 일이 동시에 발생한 것도 신기했다. 함부르크에서 거의 외톨이에 가깝게 지내고 있는 나인지라 그동안 이런 캠페인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내 딴에는 한국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마스크 나누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을 받아서 나도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마스크 나누기를 해본 것인데 그러고 돌아가는 길에 '당케슌 캠페인(제 맘대로 지은 이름입니다)'을 하는 멋진 이웃 아주머니를 만나다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사실 마스크 2개 나눠줘놓고 뭐 생색이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야기 하고 싶었다. 지금 해외에 특히 유럽에 거주하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종차별 때문에 고민을 하고 또 이런 시국에 독일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한다. 오늘 어떤 지인분은 코로나보다 인종차별이 더 걱정이 된다는 말도 했다. 나도 많이 그랬다. 하지만 오늘 내가 먼저 마스크를 건네주면서 그 두려움을 완전히 깨버렸다. 사실 그동안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이 내가 좋아하는 곳이긴 하지만 내 나라가 아니니까 난 언제든 한국으로 가버려야지 하는 방관하는 자세로 물러서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든 나도 여기서 3년을 산 사람인데 여기가 내 고국이 아니라고 해서 내 도움을 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감사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인종차별을 두려워 하며 사람들을 의식하기만 하다가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더니 모든 게 편해졌다. 비단 한국 정부가 코로나 19 대처 노하우를 독일 정부에 전해주는 것만이 국가간의 도움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오늘 내 이 작은 마스크 2장으로, 적어도 그 캐셔직원분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인식도 함께 심어주지 않았을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제는 좀 더 당당하게 싸워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그런 사람들이 속으로 가장 두려움에 떨고 있는 외강내유형 사람들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파워 넘쳤던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박수 소리가 담긴 오늘의 독백 영상을 살짝 올리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어쩌면, 생각보다 따뜻하게 이 위기를 함께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케슌~은 1:23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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