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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y 04. 2020

달팽이 일일 택시기사 되어주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평소보다 더 게을러지는 토요일 아침.

이번 주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8시 즈음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걷고 올까, 달리기를 하고 올까 고민을 하다가, 최근 들어 쓴 적이 거의 없어서 구석에 내던져둔 줄넘기를 다시 꺼내서 가방에 넣고 공원으로 나섰다. 우리 집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공원은 2개가 있는데,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아주 길고 짧은 공원이다. 끝에서 끝을 왕복하는 게 30분 정도 걸려서 저질체력인 나에게도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그 공원은 길이 좁아서 줄넘기를 할 곳은 마땅치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잘 가지 않던 반대쪽 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은 앞에 말한 공원보다는 좀 더 넓고 끝도 더 길게 이어져 있어서 한 번도 끝까지 가본 적이 없었다.

끝이 어딘지 몰라서 가는 길이 얼마나 걸릴지, 또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그곳은 나에게 미지의 영역 같은 곳이었다. 그래도 줄넘기를 편하게 할 만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호기심에 발을 들인 그 공원에서, 나는 갑자기 그 끝이 궁금해졌다. 이미 줄넘기를 할만한 공간은 찾았는데도 말이다. 토요일 아침이라 유난히 한적한 공원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답지 않게 오랜만에 주말 아침에 공원을 나와서인지, 어딘가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길을 걸으면서 점점 모르는 풍경이 진해질수록 태생을 길치로 태어난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네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니라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코로나 락다운으로 외출다운 외출도 하지 못하는 때라 그런지,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기분이 날 좀 더 두근거리게 만든 모양이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지도를 보지 않기로 했다. 오늘도 할 일은 쌓여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토요일 아침. 무엇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렇게 계속 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눈에 유독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달팽이였다. 요 며칠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길가에 달팽이가 많이 나와있었다.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달팽이들은 우리나라 달팽이들과는 달리 집이 없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몸이 상당히 큰 편이다. 그래서 자칫 잘못 보면 거머리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게 또 자세히 보면 매력 있게 생겼다. 예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해서 - 그리고 가까이서 관찰해도 내게서 빨리 도망갈 수 없는 동물이라서 - 한 번씩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참 쳐다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독일어 독해 공부를 하느라 읽었던 지문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만드는 차도나 인도들로 인해 단절되고 고립되는 자연환경에서의 동식물의 변화를 관찰한 실험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문에 나온 단어들은 너무나 어려웠지만, 내용은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당연히 자연 생태계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다는 주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물도 식물도 잘 살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지만, 그곳이 오랫동안 고립될 경우에 많은 생물이 죽거나 심하게는 멸종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달팽이들을 다시 보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세네 걸음이면 성큼성큼 건너갈 거리이지만, 저 달팽이에게는 얼마나 먼 거리 일지 생각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좀 더 편하게 다니자고 만들어둔 인도와 자전거 도로가 그들에게 조금의 흙도 내어주지 않은 채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주위를 좀 더 살펴보니 그렇게 길을 건너다 무심결에 밟혀 죽었거나 지나가는 자전거에 깔려 죽은 듯한 달팽이의 시체도 드문드문 보였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이 날의 나는 ‘여유로운 토요일 아침을 보내는’ 중이었던지라, 갑자기 이 달팽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침 널찍해서 달팽이가 타기 좋은 나뭇가지가 버려져 있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달팽이에게 다가가 그 앞에 나뭇가지를 놓아주었다. 가끔 조심성이 많은 동물들은 이런 것을 경계해서 오히려 피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달팽이들은 스스럼없이 나무에 올라타 주었다. 아무래도 돌바닥보다는 나무가 자기들도 더 안전하다고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달팽이 고객님들이 택시에 다 탑승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물론 시간이 걸렸다. 행여나 고객님이 문을 닫기도 전에 출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달팽이가 온전히 다 나무 위에 올라온 다음에 움직였다. 그렇게 한 마리, 아니 한 분, 두 분 왼쪽 잔디밭에서 오른쪽 잔디밭으로 길을 건너는 것을 도와드렸다. 많은 달팽이 손님들이 향하던 오른쪽 잔디밭에는 이미 많은 달팽이들이 먼저 도착해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두 번째 달팽이 손님을 태울 때에는 가는 길에 또 다른 달팽이 손님을 만나 합석을 시켜드렸다. 다행히 두 달팽이 모두 넉넉하게 탈 수 있는 차를 뽑아온 게 신의 한 수였다. 달팽이들은 아주 느리게, 하지만 내 생각보다는 꽤 빨리 나뭇가지에 잘 올라탔다. 처음엔 더듬이를 뻗었다 숨었다 하며 경계를 하는 녀석도 있었지만, 모두 100% 안전 운전으로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다. 심지어 내리기 싫다고 떼를 쓰는 진상 고객님도 있었다. 그렇게 네다섯 마리를 옮겨주고 나니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기립성 저혈압이 있는지라 달팽이를 한 마리 보내줄 때마다 어지럼증을 버텨내야 했기 때문이다.




어질어질 해져오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다시 끝을 모르는 방향으로 나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바닥을 더 잘 보고 다녀야겠다는 생각과 자전거를 탈 때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누려 왔던 이 편의 시설들이, 그것을 결코 당연히 여길 수 없는 존재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들이 또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며 길을 계속 걸었다. 왜 인도는 꼭 돌로 덮여 있어야만 하는 건지, 동물들을 위한 다리를 만들어줄 수는 없을까, 아니면 지하 터널을 만들어줄 수는 없을까, 근거도 없는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도심과 관광지에 야생 동물들이 출연한다는 뉴스도 떠올랐다. 그저 지금까지는 야생 동물들이 이곳까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사람들 때문에 못 오고 있었던 거구나. 미국에서도 또 독일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지금 코로나 락다운이 인간의 기본 권리를 침해한다며 데모를 하고 있는 사람들도 떠올랐다.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들은 다른 생명들의 기본 권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또는 보호받아 마땅할 타인의 권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코요테는 일부러 사람들이 다니는 곳을 피하기라도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잔디밭을 향해 몸을 던지는 달팽이들을 안전하게 옮겨주면서, 또 땅을 살피며 행여나 실수로라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조금이라도 그 빚을 갚은 기분에 위로받는 건 이기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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