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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18. 2020

맛있게 다 먹었는데 돈이 없었던 날의 일기

독일은 현금만 받는 곳이 많다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요즘 일주일에 3번, 아침을 카페에서 시작하는 챌린지에 도전 중이다. 코로나도 조심해야겠고, 돈도 한 푼이라도 아껴야겠기에 끝까지 집에서 버텨보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집보다 카페가 집중하기에 훨씬 더 효율적인 장소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새로운 시험이 또 얼마 남지 않았다. 카페로 가서 공부만 제대로 한다면, 꽤 가성비 좋은 투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최근 집 근처에서 새로운 카페를 발견했다. 워낙 주택가인지라 그럴싸한 카페도 가게도 보기 드문 동네인데, 꽤 트렌디한 인테리어에 커피도, 케이크도 모두 맛이 일품인, 마음에 아주 쏙 드는 카페였다.



오늘은 그 카페를 두번째 방문하는 날이었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서 카페로 걸어갔다. 10분 정도 걸으니 도착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문이 닫혀있었다. ‘아차, 이 카페는 10시에 열었지.’ 카페가 문을 열기도 전에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다행히 야외테이블이 있어서, 거기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한국의 푹푹 찌는 열기와는 다르게 함부르크는 이제야 반팔을 맘편히 입고다닐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게 더운 날이 찾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내일 모레면 잠깐 굿바이 인사를 해야하는 것 같지만... 다시 올거지? 여름?)



아이패드와 아이폰을 충전하려고 늘 가게 내부의 콘센트 옆자리만 찾던 나라서, 오랜만에 야외석에 앉으니 기분이 색달랐다. 조용한 주택가,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고, 고개를 드니 위에서 초록초록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었다. 그늘에 앉아있어도 춥지 않은 적당한 온도. 너무 차갑지도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산뜻한 공기, 곳곳에서 지저귀는 새의 노래들. 아침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글을 적고 있자니 어느 새 10시가 되어 카페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 쓰는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어서 원래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오지만, 오늘은 먹을 것은 떨어졌는데 장을 봐둔 게 없어서 빈 속으로 나왔다. 아침으로 간단하게 크로아상을 시키고 홈메이드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사이드로 선택했다. 정말 홈메이드로 만든게 보이는 질감에 맛도 훌륭했다. 따뜻한 커피도 한 잔 시켰다. 요즘은 안 마시던 커피도 마시고 있다. 커피가 마냥 몸에 안맞는다고만 생각했는데,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는 커피가 있고, 마시면 속이 울렁거리는 커피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다행히 이 곳 커피는 한 잔 정도 마셔도 속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다 먹고 뚫어져라 아이패드를 쳐다보고 있는데, 이어폰 너머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할로? 할로?”



무슨 일인가 싶어 이어폰을 빼고 쳐다보니 카페 직원이었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반만 알아듣고 제일 중요한 핵심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 두어번을 다시 되물었다. 두 번의 설명에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먹고, 마시고, 앉아있을 때?’ 요며칠 카페에 너무 오래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던지라 카페에서 날 싫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많이 해왔어서 그런지 내 머리 속에서 해석되는 내용은 ‘다 마시고, 다 먹었으면, 너무 오래 앉아있으시면 안되요.’ 뭐 이런 내용들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 갸우뚱거리고 있으니 옆에 앉아있던 직원분이 영어로 다시 설명을 해줬다.



“먹거나 마실 때 말고도, 자리에 앉아있을 때는 마스크를 빼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한 거였어요. 물론 원하면 쓰고 계셔도 상관은 없지만요. 혹시 꼭 써야하는 줄 알고 쓰고 계신걸까봐 답답하신 건 아닌가 걱정이 됐었나봐요. :) “



전혀 엉뚱한 쪽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내가 우스웠다. 고맙단 말을 처음 그 직원에게도 하려고 했지만, 내가 말을 못알아듣자 이미 다른 일을 하러 자리를 떠난 뒤였다. 그렇다고 찾아가서 고맙단 말을 할만한 일은 또 아닌 것 같고, 통역을 해준 직원에게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나중에 계산할 때 아까 그 팁 고마웠다고 해야지.’



사실 조금 신경쓰이기는 했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잠깐 마스크를 내리고 있었던 틈에 도서관 직원이 다가와 마스크를 쓰라고 주의를 주었었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있는 동안 잠깐 내렸던 거라 조금 억울했지만 별말없이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도서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 나오려던 참이었다.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이다보니 아무래도 더 엄격한 것 같았다. 카페는 조금 규정이 다른가 싶었다. 어쨌든 나를 배려해준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온도가 조금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 평일 아침에 카페를 다니게 되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아침에 이런 작은 카페들에 앉아있다보면 카페 직원들과 손님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인간미가 느껴질 때가 많다. 내용은 다 못알아듣지만 그들의 목소리, 웃음,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다. 그저 커피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을 넘어서서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간의 대화다. 물론 프랜차이즈 같은 곳들은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 곳은 차가운 도시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차갑지 않고 따뜻한 면들이 구석구석 숨어있다. ‘아, 나도 저렇게 현지인들하고 대화나누고 싶다.’ 아직 그들의 수다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방금이 어쩌면 그런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차적으로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2차로는 아마 알아들었더라도 말주변이 부족한 내 반응은 ‘고맙습니다.’하고 끝났버렸겠지만.












그러다 두어시간 쯤 지났을까, 다시 살짝 허기가 진 나는 산딸기 소스가 올려진 치즈 케이크도 하나 더 주문했다. 요즘은 늘어난 스트레스를 이렇게 카페에서 맛있는 케이크를 한 조각 먹는 일로 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집의 치즈케이크는 스타벅스의 치즈케이크와는 또 다르게 매우 풍부한 맛이 있다. 독일도 케이크는 많지만 한국과는 그 종류가 상당히 다른 편이고, 내가 좋아하는 한국식의 맛을 내는(?)  케이크를 찾기는 힘든 편이라, 이렇게 맛있는 치즈케이크를 파는 곳을 발견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케이크가 화근이었다. 케이크를 다 먹고 30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몸 상태가 너무 안좋아져서 계획보다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캐셔로 가기 전에 지갑을 꺼냈는데 문득 이 카페는 현금밖에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정말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지만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독일에는 상당히 많이 있다. 그래도 많이 줄어든 편이고, 특히나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현금과 카드 결제가 동시에 되는 곳은 현금 결제를 지양하고 카드 결제를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현금을 잘 안쓰지만 그래도 얼마 정도는 들고다니려고 하는데 하필 어제 무슨 일 때문인지 현금을 썼었다. 그리고 지금 내 수중에는 내가 먹은 커피와 크로아상, 케이크값을 다 낼 돈이 없었다.



‘망했다... 어떡하지. 케이크 먹지 말걸...’


 
그런 적들이 있긴 했다. 현금 결제만 되는 곳에 현금이 없다는 사실을 까먹고 갔다가 계산하려고 보니 현금이 없어서 주문을 취소해야 했던 경우들. 하지만 이렇게 다 먹고 나서 현금이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보통 다른 카페들은 주문할 때 결제를 하는데, 하필 여기는 다 먹고나서 나중에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그게 내 건망증과 겹쳐서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메뉴판을 보고 가격을 계산해봤다. 내가 내야할 돈은 8.40유로, 내가 가진 돈은 6.50유로. 약 2유로가 모자랐다. 자리에 다시 앉아 가방 주머니 구석구석을 샅샅히 뒤졌다. 혹시 1유로라도 더 나올까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가방에는 단 한 푼의 여윳돈도 없었다. 지갑도 구석구석 뒤졌다. 제일 안쪽에 우리나라돈으로 5천원짜리와 만원짜리가 있었다. 혹시나 한국에 도착한 직후에 필요할까 넣어둔 비상금. 이게 유로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지만, 그렇게 될 리 없었다. 한국이라면 계좌이체를 하면 되겠지만, 독일은 그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여긴 계좌이체를 해도 상대가 받으려면 최소 1~2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혹시나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평소 자주 연락하던 친구에게 상황을 털어놓아봤다.





“야, 나 대박... 카페에서 다 먹고 나가야 하는데 돈 모자라. 어떡하지. ㅠㅠ”


“너 답다 ㅋㅋㅋ 이제 너 거기서 한달 내내 설거지하는 거야? ㅋㅋㅋㅋ”





돈 없으면 설거지하는 건 독일도 똑같은가보다. 친구는 오히려 나를 비웃으며 놀렸다. 실패. 큰 돈이라면 차라리 와달라고 부탁이라도 할 텐데 2유로 때문에 오라고 하기엔 좀... 애매했다. 캐셔를 보니 아까 나에게 마스크에 대한 조언을 해주던 직원이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녀의 인상이 그렇게 친절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되었다. 아까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을 못알아들어서 나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원체 이런 말을 잘 못하는 소심한 성격에다 거기다 독일어로 해야하니 머리 속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래도 잘 이야기하면 이해해주겠지? 나중에 갖다준다고 해보자.’ 한참을 테이블에 앉아 고민만 하던 나는 드디어 캐셔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혹시나 정말 현금만 받는지 물어봤지만 역시나 현금만 받는 곳이었고, 혹시나 계좌이체가 안되는지 물어봤지만 역시나 안된다고 했다. 나는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한 후 집이 여기서 가까우니 오늘 내로 다시 와서 남은 돈을 내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나 안된다고 하면 뭘 맡겨야 하나, 머릿속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선뜻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당신을 믿어보죠.”라고 했다. 믿어본다는 말을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믿고 보내주는 건데 배신하면 안돼’ 이런 메시지가 담겨있는 듯도 했다.



신뢰를 져버리지 않을 것은 당연했지만, 혹시나 내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조차 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바로 은행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처음 본 나를 거기다 외국인인 나를 아무런 담보도 없이 믿어준 그 사람이 참 고마웠다. 그렇게 나는 한 시간 뒤, 다시 그 카페로 돌아가 미처 다 내지 못했던 돈 2유로와 2유로를 추가로 더 냈다. 원래 팁으로 내려던 1유로에 믿어준 것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로 1유로를 더 했다. 충분한지 적은지 어떤지는 잘 몰랐다. 그냥 그 순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서 생각해보니 그녀는 아이를 가진 만삭의 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그녀와 그녀의 아이가 모두 건강하길 진심으로 빌었다. 여전히 말주변이 부족하고 생각하는 것이 느린 나는 직접 그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지만, 그녀가 나를 믿어준 그 순간과 또 그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작은 배려에 적적한 해외 생활에서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까.






이 일은 꽤 기억에 남을 것 같아, 그녀를 생각하며 그려본 그림도 함께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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