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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ug 18. 2020

처음으로 독일 지하철에서
벌금 딱지를 받았다

카페에서 20분만 늦게 나왔더라면, 그 지하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오늘 하루는 너무 피곤했다. 아침부터 독일어 수업에, 커뮤니티 미팅에, 전 회사 대표님 미팅까지 쉬는 시간도 없이 줄줄이 겹쳐서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일정이 다 끝나고 나니 오후 5시 30분.



원래는 요즘 운동을 하느라 집에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오늘은 정신적으로도 피곤했거니와 미팅 내내 카페에 앉아있는데 에어컨도 없이 너무 더웠던지라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을 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기 한 정거장 전 역에서 창가에 앉아 멍때리고 있는데 검표원들이 타는 듯 했다. 표를 검사하는 구나라고 예상도 되었고, 교통카드를 챙겨왔었기에 아무 걱정 없이 앉아있었는데, 순간 시계를 보다가 아차 싶었다. 5시 45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내가 구매하고 있는 정기권은 파트타임이라 하루 중 지하철을 탈 수 없는 시간이 일부 정해져 있는데 퇴근 시간인 오후 4시부터 6시 동안에는 이용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도 늘 그때 그때 교통비를 냈지 정기권을 써본 적이 없는지라 적응하느라 꽤 애를 먹었었다. 작년에도 시간을 착각해서 그 시간대에 버스에 타려다 못탄 경우도 있었고, 지하철에서 나오는데 아슬아슬하게 검표원에게 걸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며(?) 작년에는 적응을 했었는데 연말에는 한국에 다녀오고 다녀오니 코로나 락다운이 터져 한동안 정기권을 아예 정지시켜놓느라 다시 완전히 감을 잃었었나 보다. 차라리 버스는 탈 때 미리 찍을 수 있어서 시간을 까먹고 타게 되는 경우라도 안된다고 뜨기 때문에 안타면 그만인데, 시원하게 뚫린 독일 지하철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해놓고는 벌금을 척척 매겨버린다. 생각이라도 하고 탔다면 검표원이 보이자마자 도망이라도 갔을텐데, 나름 당당하다며 멍때리고 있다가 목덜미를 턱하고 잡혀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내릴 역에 도착했는데 검표원이 다른 사람을 검사하느라 내 여권을 들고 돌려주지를 않았다. 나 말고도 걸린 사람이 있었다. 남자였다. 둘 다 역무원을 따라내렸다. 그 사람도 시간을 깜빡했다고 했고, 나도 그랬다.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이 걸린 모양이었다. 신분증을 달라고 했다.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공항이 아닌 곳에서 여권과 비자를 보여줄 일이 생겼다. 역무원이 내 비자에 적힌 번호랑 이름, 주소 등을 손바닥만한 기계에 꾹꾹 눌러 적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나마 여권과 비자라도 안까먹고 들고온게 다행이다 싶었다. 이것도 깜빡했다면 더 큰 일이 생겼으려나. 벌금이 얼마냐고 물으니 '보통은' 60유로 라고 했다. 요즘 환율이면 8만 4천원 정도 되는 돈이다. '보통은' 이라는 말을 했다는 건 왠지 협상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돈이 없었고, 그러니 우는 소리라도 하면 깎아줄 것 같았지만 그럴 기운조차 없었던 나는 그냥 얌전히 벌금 용지를 받고 돌아왔다. 한 달 안에 계좌이체를 하거나 서비스 센터에서 내라고 했다. 휴.




 



함부르크의 지하철 시스템은 정말 어렵게 되어있기도 하고, 일일권 티켓도 시간 제한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좀 다르게 정해져 있고는 해서 처음 오거나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헷갈리기 십상이다. 예전엔 지인의 동생도 여행차 왔다가 시간을 생각 못하고 공항에 가던 지하철에서 걸려서 벌금을 냈다고 했었다. 평소의 지하철역은 검사하는 기계나 사람이 전혀 없어서 자유롭다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검표원들이 불시에 나타난다. 그럴 때면 표를 가지고 있어도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혹시나 내가 뭔가 잘못 산 건 아닐까, 트집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은 너무 너덜너덜해서 쪼그라들 심장도 없었는데, 하필 시간을 깜빡하고 타서는. 어휴.




안그래도 쪼들리는 상황에 갑자기 훅 하고 날아가버린 60유로가 너무 아까웠다. 
그냥 카페에 20분만 더 앉아있다가 나왔더라면,
아니면 굳이 달려서 그 지하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알아채서 표를 사서 탔더라면,
라면 도돌이표가 머리속에서 계속 맴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몇번이나 울컥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아무도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지하철을 타기로 선택했고, 내가 시간을 잊어버렸을 뿐인 것을.
그런데도 왠지 모를 억울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울컥거릴 일인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실은 지금 60유로에 휘청거리는,
내 통장 사정을 들킨 것 같아 너무 쪽팔렸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 같은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냐고 울어봤자 바뀌는 것도 없다. 
어차피 코로나 락다운 동안 일시 정지를 시키느라 두 달 정도 내지 않았으니, 코로나가 없었더라면 나갔을 교통비라고 여기면 그만이었고, 어차피 맨날 헷갈리던거 이렇게 확실히 벌금을 내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다시는 헷갈리지 않겠지 좋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돈이 나갈 일이 생긴다는 건, 돈이 들어올 일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이런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기로 했다.
그래도 글을 쓰다보니 또 다시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른다. 


오늘 일은 그저 언젠가 웃으면서 추억할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이런 건 그저 지나가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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