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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Sep 07. 2020

독일에서 보이스피싱 당한 썰



오랜만에 방금 일어난 따끈따끈한 이야기를 공유하려고 한다.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 


때는 불과 두어시간 전, 점심 시간이었다. 콜라비 김치만 넣고 돌돌 말은 김밥(너무 맛있음)을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아 부엌에서 시리얼을 만들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거실로 달려나갔다. 한국에서도 전화는 많이 안울렸던 내 핸드폰이지만, 독일에서는 더더욱 드문 일이다. 무슨 전화인가 깜짝 놀라 뛰쳐나갔다. 발신인의 번호는 뜨지 않고 Anonym(익명) 이라는 단어만 떠 있었다. 요즘 살고 있는 건물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개개인의 집 문을 열어주어야 할 때가 있어서, 공사 때문에 그러나, 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떤 젊은 남자 목소리였고, 말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했다. 다시 들어보니 이베이가 어쩌고, 에어팟이 어쩌고 했다. 아하, 지난 주에 이베이 중고 사이트에 팔려고 올려둔 에어팟 때문에 연락이 왔구나 했다. 하지만 늘 어플에 있는 채팅 기능으로 연락이 왔지, 전화로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럽긴 했다. 통화가 부담스러워서 채팅으로 이야기 하자고 했더니 지금 사정상 채팅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배송이 가능하냐, 배송비 포함 80유로면 되냐, 정품이 맞냐, 이것저것 정말 물건을 살 것 처럼 물어봤기에 나는 정말 그런가보다 했다. 배송이 가능하다 하니 당장 돈을 보내겠다며 페이팔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페이팔 주소를 알려주고나서 무슨 말을 더 들었는데, 말이 너무 빨라서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해서 대충 알겠다고 하고 페이팔 알람이 뜨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돈을 보낸 거냐고 다시 물으니, 그 전에 배송비를 따로 처리를 해야한다고, 문자로 받은 메시지에 있는 숫자를 불러달라고 했다. 평소에 문자 알람을 꺼둬서 몰랐는데 들어가보니 정말 인증번호가 하나 와있었다. 거기에는 기존에 내가 페이팔에서 받았던 예전의 인증번호 히스토리도 두어개 있었다. 번호를 불러달라 재촉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번호를 읊었다. "1..1..3..1..1..2..요.(설명을 위한 예시 숫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뭔가가 찝찝해서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이 인증번호가 어디에 쓰이는 거더라? 근데 얘가 배송비가 대체 뭐 어쨌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잘 못알아들은건지 전화를 건 남자가 '113이에요? 115에요?'라고 앞번호 세자리를 다시 물어왔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인증번호 메세지 맨 뒤에 있는 'Don't share this code with anyone.(이 코드를 아무하고도 공유하지 마시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그때라도 정신이 든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달까. 난 번호를 다시 불러주지 않고 그 남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돈 보낼려면 이메일 주소만 있으면 되는데 이걸 왜 불러달라는거에요?"


"배송비를 처리하려면 이렇게 해야되요."


"배송비를 같이 보내면 되잖아요. 보통은 이렇게 안하죠."


"아니에요. 다 이렇게 해요." 


"여기에 코드 공유하지 말라고 문자에도 써있어요. 이렇게는 안하죠."


"아니에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이게 진짜 정상적인거면 나중에 다시 해요."


"뚜- 뚜- 뚜-"




결국 나를 설득하려고 두세번 시도하던 남자는 내가 눈치챈 걸 알았는지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번호를 모두 불러줬고, 그 사람이 다 받아적었는데 숫자 하나만 헷갈린건지, 아니면 6자리 중에 2자리만 알아들은건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불안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기둥처럼 솟아오르고 온 몸의 신경이 흥분하고 뇌 한쪽이 빠르게 가열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페이팔을 오래 쓰긴 했으나 당황한 상태에서 평소에 써보지도 않은 메뉴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어떡하지? 일단 콜센터에 당장 전화를 하자.' 




평소라면 전화보다는 이메일 연락을 선호하는 나이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놈들이 뭐라도 결제를 하면 어떡하나 불안했다. (그 놈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통화 중 옆에서 친구가 같이 들으면서 내가 이메일 주소를 불러줄 때 도와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일 페이팔 콜센터 번호가 있었고, 나는 바로 통화를 시도했다. 이 번호를 눌러라, 저 번호를 눌러라, 이리저리 뱅뱅 돌다가 겨우 어떤 부서에 다다랐을 때는, 기계음은 아니었지만 녹음이 된 메시지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코로나 때문에 전화 상담이 어려워 지금은 이메일로 연락을 받고 있다는 식의 안내 메시지였다. '그래, 나도 이메일을 좋아하지. 근데 이건 아니잖아.' 어떡하지를 연발하다가 평소 자주 연락하는 독일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 나: 야, 나 진짜 방금 똥멍청이 짓을 했어.


- 친구: (고양이가 팝콘 먹는 이모티콘을 보냄) 



- 나: 나 지금 보이스 피싱 당한 듯



- 친구: ????



늘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웃픈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터라 그 중 하나일거라 생각한 친구는 들을 준비가되었다는 듯 고양이가 팝콘을 먹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너무 급해서 그러거나 말거나 오타가 나거나 말거나 미친 속도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계속 페이팔 페이지를 뒤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친구는 자기도 알아보겠다며 두 팔 벗고 나섰다. 일단 계정을 블락하거나 비번을 바꾸라는 말에 비번부터 바꿨다. 도움말에서 Block을 찾으니 결제 정보를 삭제하는 방법이 나왔다. 설정 페이지에 들어가 연결되어있던 계정을 삭제하려고 하니 오류 메시지가 떴다. 하필 이럴 때 오류라니. 속으로는 계속 '이 똥멍청아, 그걸 대체 왜 불러줬어!!!'라고 나를 책망하는 외침과 '아니야, 일단 진정하고 상황부터 해결하자.'는 두가지의 목소리가 좌우에서 싸워댔다. 다행히 두번째 목소리가 더 강해서 몇 번인가 더 결제 정보 삭제를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를 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계정 탈퇴' 버튼. 한 번 탈퇴하면 과거의 결제 기록은 모두 볼 수 없고 계정을 다시 살릴 수도 없다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친구는 비번을 바꿨으니 괜찮을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미 그 이야기를 듣기 전에 너무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당장에 계정을 날려버렸다.







그렇게 내 페이팔 계정은 순식간에 뻥-하고 터지듯 날아가 버렸다. 계정 삭제는 간단했다. 비밀번호를 다시 넣으라고 하지도 않았고, 구구절절한 사유를 묻지도 않았다. (이 부분은 참 좋았다.) 그렇게 자주 쓰지도 않는데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계정을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제서야 한숨이 놓였다. 하지만 심장은 계속 벌렁거렸고 누구보다 나에게 화가 났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개발자까지는 아니어도 오랜 시간 IT업계에서 일했던 사람이고, 이런 시스템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 IT업계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도 다 알만한 상식이다. 인증번호를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말 것...



 하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의 말을 100%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못알아듣는것도 있었지만 그들도 급한 심리를 조장하려 일부러 말을 빠르게 했던 것 같다) 얼떨결에 그냥 일어난 일이었다. 살면서 내가 이런 얼토당토 않은 보이스피싱에 당할 줄은 정말로 상상도 못했다. 상황이 끝난 뒤에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나에게, 이건 체크해봤냐, 저것도 체크해봤냐, 그럼 괜찮다, 아무 일 없을 거다 조곤조곤 말해주는 친구 덕분에 열 받았던 마음이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친구는 지금도 IT업계에서 일하고 나보다 테크쪽을 더 잘 알고 있어서 신뢰가 갔다.) 앞으로도 혹시나 절대로 인증 번호를 남에게 알려주지 말라는 친구의 당부에 나는 결국 뻥 터져버렸다. 




- 나: 나도 알지... 아.는.데. 당.해.서. 내가 더 한심하게 느껴져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친구: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너 자신한테 화내지는 마.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를 쉽게 책망할 때 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은 탓하지 말라고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이 친구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자책하는 나를 부드럽게 멈춰주었다. 



그렇게 다행히도 큰 피해 없이 끝난 나의 인생 첫 보이스 피싱 사건. 내가 진정되자 "그래도 니 발음이 널 살렸네?"라는 친구의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에 둘다 빵 터져서 깔깔깔 웃었다. 인증번호를 다 불러주었음에도 내 발음이 안좋아서 상대가 못알아들은 것이 신의 한 수 였달까. 내일 모레면 또 있을 시험에 부족한 내 독일어 실력을 탓하기만 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내 실력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오늘의 교훈

- 어떤 상황에서도 인증 번호는 공유하지 말자. 
- 홀리듯이라도 하지 말자.
-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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