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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Nov 01. 2020

비전도, 열정도, 계획도 없는 도전은 하면 안되는 걸까

독일행을 결정하기까지

처음 독일에 가게 된 계기는 회사 출장이었다. 오랜 백수 생활로 모아놓은 돈이 바닥을 보여갈 무렵 전 회사의 옆팀 팀장님이었던 분에게 새로운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었다. 독일 회사에서 새로 세운 작은 한국 지사의 프로덕트 매니저였다. 당시에는 다시는 회사에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준비하던 공부가 있었지만, 비어 가는 통장을 바라보다 보니 이쯤에서 현실과 타협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다 함께 독일 본사로 날아가 인사를 나누고 회사 전반의 업무 프로세스 과정을 익히는 온보딩 시간을 보냈다. 그게 독일과의 첫 만남, 함부르크와의 첫 만남이었다. 



온보딩 출장은 일주일 정도로 짧았지만, 그 뒤로도 나는 두어 번을 더 함부르크로 장기 출장을 다녀왔다. 두 번 모두 춥고 흐렸던 겨울에 다녀온 출장이었음에도 함부르크는 내게 제법 좋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출장으로 독일 땅을 밟아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만족했는데, 점점 이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독일에 출장을 오기 전까지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소시지, 자동차, 맥주. 이것이 내가 독일에 대해 아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일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 하나일 뿐 미국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착각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한 번 다녀온 전적이 있다 보니 딱히 독일이라는 나라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출장으로 세 달 정도 함부르크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독일은 미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 치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늘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달까. 이 곳이 어떤 나라인지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회사를 통해 본사로 전근을 가거나 아니면 아직 내게 남은 마지막 카드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가는 방법이었다. 첫 번째 방법은 어차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도 상황이 더 안 좋았다. 내가 두 번째 출장에서 돌아올 때쯤 독일 본사가 중국 회사에 인수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발생할 때면 대부분은 어김없이 뒤따라오는 대량 정리해고가 회사를 휩쓸었다. 아직 변변치 않은 수익만 내고 있던 한국 지사도 그것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회사를 나왔다. 하지만 웃기게도 얼마 안가 같은 회사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중간 이야기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생략)



재입사를 하면서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기회가 된다면 독일 본사로 가고 싶다는 의중을 상사에게 전했다. 그는 내가 한국 지사에서 다시 맡게 된 프로젝트로 성과가 나면 본사와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다시 들어갈 때 연봉 재협상도 성공적이었고, 전에 비해 주어진 권한도 많았고, 상사는 한국에 상주하고 있지 않아 업무 환경도 매우 자유로웠다. 여기서 좀 더 일을 하다가 독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인수합병 직후의 회사는 위태로워 보였다. 새 프로젝트를 가지고 어느 세월에 성과를 내서 언제 독일에 갈 수 있을지 내겐 너무나 불확실한 도전이기도 했다. 게다가 하루라도 빨리 독일에 가고 싶은 내 욕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결국 나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사표를 냈다. 독일로 건너가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퇴사를 하고 나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렸다. 일을 하면서 계획을 더 세운 뒤에 그만두어도 되지 않냐고 했다. 하지만 회사는 마치 내게 연애 같아서 사랑할 땐 모든 걸 다 내어주었지만, 마음이 떠난 후에는 무슨 일을 해도 갑갑하고 빨리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한 번 차이고 난 뒤의 재결합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해두자. 



또다시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생각했다.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선 기분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데에는 미련이 없었다. 유명한 대기업도 다녀봤고, 꽤 괜찮은 수준의 연봉도 받아봤고, 좋은 사람들과도 일해 봤고, 복지 좋은 회사도 다녀봤고, 큰 회사, 작은 회사 모두 겪어봤다. 완벽한 회사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다. 단점을 감수하고서라도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는 ‘매력 포인트’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고 부러워하는 그 수많은 장점들이 정작 겪어보니 나쁘다고야 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계속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글을 쓰고 싶었고, 그 일은 꼭 독일이 아니어도 됐지만 독일에 가고 싶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안 되는 걸까. 뚜렷한 비전과 열정과 계획이 없는 도전은 하면 안 되는 걸까? 




‘그래 딱 1년만 있어보자. 막상 갔는데 별로일 수도 있지.’




결국 나는 서른을 넘기기 전에 마지막 남은 워킹홀리데이 찬스를 쓰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내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비전은 눈 감았다가 뜨면 바뀌고, 열정은 나를 번 아웃시키기에 바빴다. 그래,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만 있어도 충분하다. 많은 돈과 좋은 타이틀보다 내가 더 갖고 싶었던 것은,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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