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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Nov 03. 2020

내 나이 서른넷, 독일 유학생이 되다




1년만 살아보자던 독일 라이프가 어느새 햇수로 4년이 되었다. 4년 동안 매년 비자를 1년씩 연장하면서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회사를 다시 다닐까, 프리랜서를 해볼까, 대학원을 갈까, 한국으로 돌아갈까. 인생은 역시 뜻대로,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를 실감하면서 마지막으로 부딪혀 본 도전이 드디어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오늘부터 독일의 대학생이 되었다.



올 해는 수능보다 더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했다.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몸은 마음을 따라가 주지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수능 때보다 더 열심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여러 번의 시험 끝에 겨우겨우 대학 지원에 필요한 최소 등급의 점수를 받았다. 정말 스타벅스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너무 기뻤다. 지금까지 살면서 받은 시험 결과 중에 가장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마 여태까지는 시험에 진지해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늘 시험은 평소 실력대로 보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대로 살아왔으니까. 이번만큼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학교는 두 군데를 지원했었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곳을 지원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같은 과 독일인 친구들은 8군데에 지원했었다고 했다. 나는 그마저도 원래는 한 군데만 지원하려고 했다. 그곳도 내 성적으로는 난이도가 조금은 있는 학과였다. 대학에 지원하던 시기에는 마음 한 켠으로 한국이 그리운 마음도 꽤 컸다. 한국으로 갈지 말지 가장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커트라인이 아슬아슬한 곳에 지원해서 그 결과에 따라 내 앞날을 맡기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원 마지막 날, 그래도 몇 군데 더 지원해보자는 마음이 갑자기 생겼다.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하는 기분으로 가까운 대학을 모두 뒤졌다. 독일 대학은 기본 조건만 갖춘다면, 인기가 없는 학과에 지원할 경우 커트라인 없이 무사히 합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학과나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지금 합격한 대학의 학과를 발견했다. Metropolitan Culture라는 이름의 흥미로운 이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유럽에서도 드문 희귀한 학과였다. 주제도, 학교 그 자체도 꽤 마음에 들어 부랴부랴 지원을 했다. 지원 마감 시간 3분 전에 겨우 지원을 마치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 목표했던 대학은 떨어지고, 3분 전에 지원한 대학만 붙었다. 참, 내 인생스럽다.




늘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순간에 나는 이상하게도 운이 좋았다.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얻는 결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처음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할 때도, 일본을 갔을 때에도, 생각도 하지 않았던 대기업을 다니게 되었을 때에도, 미국에 갔을 때에도 그랬다. 늘 아슬아슬하게 운이 좋아 얻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말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내가 내 노력을 비하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난 늘 내 실력에 비해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그래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이 나이에 독일에서 다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감사함보다 두려움과 걱정이 더 크다. 지난주에는 오티를 위해 학교에 다녀왔다. 위생 수칙을 준수하느라 많은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 하루 종일 리얼 독일어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말하는 사람의 말하기 속도, 주제, 발음, 목소리, 사용 어휘 등 수많은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중요 공지나 안내를 영어로도 하고 있어서, 영어로 소통하는 걸 시도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간 독일어가 더 안 늘 것 같아서 영어는 일부러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쉬는 시간에는 굳이 서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혼자 머리를 식혔다. 물론 거기까지 끼어들어서 친해지고, 듣기 연습도, 말하기 연습도 더 하면 베스트겠지만, 이제는 무리하지 않는다. 쉴 때 쉬어둬야 더 중요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티 마지막 즈음에는 결국 듣기를 포기했지만.)




한국어로 하루 온종일 앞에 앉아 지루한 설명을 듣고 있어도 지치는데, 거기다 독일어로 그걸 듣고 있으려니 당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래도 어쩐지 자꾸 두려움이 커졌다. 지금 내 실력으로 이 기회가 가당키는 한 걸까. 정말 그냥 운이 좋았던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상황이 없진 않았다. 일본에 처음 일하러 갔을 때도 비슷했다.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를 입도 뻥긋 못하고 갔으니 지금보다 더 최악이었다. 그때도 해냈으니 지금도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이상하게 불안감은 자꾸 커져갔다. 남들보다 2배, 3 배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와중에 생활비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진다. 나는 이 감정을 잘 알고 있다. 그대로 두었다간, 뭉게구름처럼 커져서 나를 24시간 옥죄어 올 것이 뻔했다. 정말로 오티를 다녀온 후부터는 위염도 다시 재발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기 시작했다. 20대에는 이걸 그냥 버텼다. 꾸역꾸역. 그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30대의 나는 조금 달랐다.



‘그래, 못하겠으면 그만두고 돌아가면 되지. 괜찮아. 포기해도 돼. 무리하지 마.’



이상하게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다짐보다 ‘포기해도 괜찮아.’라는 말이 스스로에게 더 위안이 되었다. ‘열심히 해서 성적도 좋은 성적을 받아야지’보다는 ‘졸업할 만큼만 하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성장했다고 해야 할지, 퇴보했다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행복과 건강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 행복을 망치는 노력, 내 건강을 망치는 노력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지금 내가 내 인생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인 것 같다.




학기 시작과 동시에 독일에는 세미 락다운도 시작되었다. 레스토랑, 카페 등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하게 되었고, 체육 시설, 문화 시설 등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상점의 경우 옷가게 마저 모두 닫았던 예전과는 달리 입장수에 제한을 두는 것으로 바뀌었다. 학교와 유치원은 열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우리 학교는 대면/비대면을 병행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모두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했다. 오티 때 잠깐이라도 느꼈던 정을 느끼기 힘들어진 것은 아쉽지만, 수업을 생각하면 나에겐 이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위로하고 있다. 그리고 안심도 된다. 예전엔 뉴스에서 숫자로만 느꼈던 코로나가 지금은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예전엔 코로나 추적 앱에 아무 업데이트도 없었는데 최근엔 꽤 숫자가 보인다. (다행히 위험도는 낮은 수준이지만.)




하필이면 이토록 힘든 상황에서 시작되는 나의 독일 대학 생활,

못 알아듣는 말 투성이인 이 실력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나의 독일 대학 생활,

그때도 해냈으니 이번에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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