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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Sep 09. 2020

당신은 오늘 누구입니까?

내 방구석 100일 표류기 3/100



내 방구석 표류기 3일차 아이템은 바로 이 목판이다. 목판이라고 말하니 꽤 딱딱한 느낌이 들지만, 여기에는 꽤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추억이 있다.

이 목판을 구매한 것은 내가 처음으로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만났던 어떤 해 겨울의 추운 날이었다. 그 당시 나는 퇴사를 고민하던 회사원이었다. 서른을 얼마 남기지 않은 20대 후반의 나이. 어리지도 많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에서 인생에 대한 고민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퇴사를 고민한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에 변화는 없었다. 내 마음과는 관계 없이 회사원으로서의 내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독일로 출장을 갔었다. 운이 좋게 크리스마스마켓 기간과 겹쳤던 출장 기간 동안 경험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신선했다. 추운 걸 싫어하는 나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출장이 끝나고 한국으로 가기 전 일주일 정도 휴가를 얻어 유럽을 짧게 여행했다. 옛날의 나였으면 상사 눈치가 보여서 절대 말도 못꺼냈을 일이었지만, 이미 한 번 회사의 쓴맛(?)을 본 나에게 제법 용기가 생겼었다. 그렇게 차를 한 대 빌려서 네덜란드를 향해 가던 길이었다. 중간에 잠깐 들렸던 어느 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 규모가 제법 크길래 둘러본 적이 있다. 어느 도시였는지 이름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 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참 잘 꾸며져 있어서 정말로 유럽 동화 속 마을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엇을 사먹어볼까, 아니면 뭔가 기념품을 하나 사볼까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구경을 하다가 내가 샀던 것이 바로 저 목판이었다. 그 가게에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 제품들이 있었다. 도마, 국자, 냄비 받침, 지팡이 등 나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건 다 만들어서 모아둔 것 같았다. 그리고 주인 아저씨는 사람들이 골라온 그 나무 물건들 위에 원하는 문구를 직접 손으로 새겨주고 계셨다. 거기에 꽂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실용적인 걸 골랐어도 좋았을텐데, 아무튼 그 때의 나는 나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저 동그란 목판을 골랐다. 무슨 말을 새길까 한참을 고민했다. 당시에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뭔가 사랑에 관련된 말을 남길지, 아니면 내 삶에 힘을 주는 말을 남길지 고민이 되었다. 남자친구가 섭섭해 할 것 같았지만, 사랑쪽은 영 끌리지 않았다. 결정장애가 있는 내가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한게 바로 'Who are you today?'였다. 그 말을 해준 것은 출장을 갔던 독일 본사에서 같이 일하던 한 옆팀 팀장이었다. 야근을 잘 하지 않는 독일 직원들이지만 종종 매니저급은 야근을 하곤 하는데, 어쩌다 둘다 야근을 하다 만나 나도 모르게 퇴사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직속 팀장은 아니었고, 지위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편해서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때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꽤 인상깊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다 기억에 남는 건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의 자세였다. 보통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조언을 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달랐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테니 듣고 판단은 내가 스스로 하라고 했었다. 처음이었다. 그는 내 고민을 순수하게 들어주면서도 판단하거나 답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자연스럽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인생 상담이 오갔다. 그 때 그 친구가 저 말을 했었다. 한 번 잘했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고.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Who are you today?'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인가? 그 질문을 던진 하루와 그렇지 않은 하루는 결이 다를거라 했다. 질문을 하면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머릿속에서 시작된다.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사람으로, 어떤 하루를 보낼 것인지.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어제의 나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의 내가 중요하다. 내가 지금 내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 내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 그게 그 때 내가 배운 내 인생을 사는 법이었다. 회사의 노예로 살 것인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사회에 아니 정확히는 회사에 이끌려 살면서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그 때의 나에게 크게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였고, 그 말을 기억하고 싶어서 목판에 새겼다. 돌아보니 벌써 5년 전의 이야기. 사실 그동안 너무 익숙해져서 잊고 있었던 물건인데 방구석 여행을 계기로 다시 돌아보는 날.




 


ps. 그 때 그 친구는 여전히 내 곁에서 내가 힘들 때마다 나에게 보석같은 위로를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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