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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Mar 09. 2022

20번 테이블의 손님


벌써 약 13년 전의 일이다. 1년 정도 일본의 한 작은 도시에 있는 힐튼 호텔의 티라운지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라운지의 이름은 ‘티럭스’. 총 대여섯명 남짓 되는 라운지 멤버들 중 나는 유일한 한국인이었고, 일본어도 아직은 서툴던 시절이었다.

호텔에서의 일은 힘들었지만, 정말 많은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기에 지금 돌아봐도 내 인생에서 가치 있었던 시간 중 하나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내가 티럭스에서 일을  , 감사하게도 몇몇 분의 손님이 나를 기억해주셨는데    분이 나이토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었다.






오히사시부리데스네, 나이토사마 :)





늘 라운지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창가 테이블인 20번 테이블에 앉았고,

늘 자리에 앉자마자 거품이 풍성한 생맥주 한 잔을 마셨으며,

너무 바쁘지 않은 이상, 매니저인 다나카상이 늘 나이토 사마의 곁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 그가 생맥주를 마시던 모습이 내 뇌리에 남아있는 건 단순히 그가 VIP라거나 단골 손님이어서가 아니었다.

나이토사마는 그 짧은 기간 동안 처음이자 내 이름을 기억해 주었던 손님이었다.

그저 자주 오는 단골이라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아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는 우리에게 많은 정을 베풀었다.

어딘가 여행이라도 다녀올 때면 카페 직원들을 위해서 맛있는 오미야게를 사와서 선물해 주었고,

평소보다 과하게, 너무너무너무너무 바빴던 어느 날에는 다들 수고했다며 우리 모두에게 밥을 사주기도 했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려본 그 때의 풍경









나이는 짐작하기로는 40대 초중반쯤 되어 보였고, 당시에 싱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한 모습이었다.

조식을 먹으러 오셨었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로 호텔 일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가게 되는 날까지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늘 평소처럼 웃으며 건강하게 지내시겠지, 생각했던 것 같다.



이듬해 초,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난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이야 서로 연락도 거의 안하지만 그 때는 아직 나나 같이 일했던 한국인 언니들이 일본에 있는 동료들과 연락을 더 주고받던 시기였는데, 호텔의 다른 부서에서 일했던 한국인 언니로부터 나이토 사마에 대한 슬픈 소식을 뒤늦게 전달받았다.

그가 3달 전 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떤 속사정이 있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몸이 좋지 않아 떠나기 전 만나지 못했던 건가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이 2009년의 오늘, 3월 9일이었고 페이스북에 적어둔 일기는 매년 내게 그를 다시 추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때도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이 컸지만, 훌쩍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 되돌아봐도 아마 그런 분을 다시 만나는 경험은 앞으로 살면서도 하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늘 혼자서 라운지를 찾는 그 모습이 그 때는 조금 외로워 보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앞이라 들키지 않게 꽁꽁 감정을 숨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 속에 남은 그의 이미지는 늘 활짝 웃고 밝게 인사하고 다정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가 정말로 그랬든 아니든 그를 밝고 다정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게 마지막으로 그가 바라던 것 아니었을까?



매년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끔 다시 그를 추억하고 싶다.

그에게 받았던 다정한 마음을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09년 3월 9일의 일기]


늘 20번 테이블에 앉으시고,

늘 오자마자 생맥주를 드시며,

바쁘지 않은 이상, 매니저인 다나카상이 늘 담소를 나누었으며,

처음으로 내 이름을 기억해주셨고,

어딘가 여행이라도 다녀오실 때면

우리를 위해 맛있는 선물을 사오셨으며,

우리가 가끔 너무너무 바빴던 날에는

다들 수고했다며 밥을 사주기도 하셨습니다 ...

아직 결혼은 하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연세는 많아도 40대 초중반쯤 되보이셨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모습은

다리를 다치셨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조식을 드시러 오셨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피곤해보이는 얼굴이셨어요.


그런데 오늘,

바로 몇 분전에 ㅇㅅ언니에게서 너무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말입니다.

그것도.. 12월에...


한참이나 지나..

너무나 늦어버린 것 같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로 좋은 곳 가셔서 행복하시길 빌어요..













*일부 단어는 일본에서의 추억 분위기를 더 잘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본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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