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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Sep 08. 2022

나는 그만 안정에 집착하다
안주해버린 것이다




오늘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도전이 될 결정을 내렸다. 정말 누군가 대신 결정해줄 수 없는 거냐고 혼잣말로 허공에 외칠 정도로 오랜 시간 끙끙댔다. 공식적으로 거절(또는 포기)하기 직전까지 가서야 결국 나를 가로막은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정이다. 소화하더라도 몸이 망가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내가 언제 현실적으로 살았던가? 언제부터 내가 계획적이고 미래예측을 하는 사람이었지? 결국 나는 전처럼, 워커홀릭으로 살 때처럼 미친 듯이 일하다가 건강이 망가질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로 했다. 그래, 어느 일에 갈등이 없고 고뇌가 없으랴. 알고도 간다는 마음 가짐으로, 다시 나답게, 들이대 보자. 대신 전처럼 건강을 담보로 하는 무리는 하지 말 것. 시간 관리하는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고, 몰입 능력을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마음이 매우 편하고 평화로움과 동시에 졸업이 가까워오면서 다시 내가 살아갈 삶과 일과 의미 등에 대한 질문, 불안, 걱정이 올라온다. '어라, 데자뷔?' 사실 20대 중반에도 똑같이 했던 고민들이다.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생각과 감정들이 너무너무 반갑다는 거다. 나의 삶에 대해, 내 꿈에 대해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20대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20대 때는 그냥 너무 막연한 모든 것들로 인해 불행하고 힘들어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적당한 불안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은 내가 타오를 수 있는 좋은 불쏘시개가 되어준다는 것을. 



지난 2년간 유학 생활에 적응하는데 급급해서 내 안의 열정에 불을 지펴주던 불쏘시개가 서서히 사라져 갔고, 그중 최근 반년은 아예 느낄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다. 평생 소망해왔던 다정한 남자친구와의 꽁냥 거리는 삶과 익숙해진 학교 수업과 과제,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 막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비해 훨씬 안정된 생활이었다. 정확히는 안정되었다기보다 길들여졌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처음에는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얻은 평화였고, 연애 같은 연애였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무력감 또 다른 형태의 불안이 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숨이 갑갑했다.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그랬다. 그래서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아주 오랜만에 한국에 가있는 시간 동안 깨달았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안정이었음을, 내가 안정인 줄 알았던 것은 사실 안주였음을.



안정에 집착하다 안주해버린 거다. 30대 중반의 나는 어느새 무섭고 두렵고 힘든 일을 요령껏 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건 내가 아닌데. 나는 오랫동안 염원했던 평화를 찾았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언제 돌아가든 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고 나를 미래의 불안에서 구해줄 것만 같은 '연인 관계'가 내겐 독이 되었던 것 같다. 아니면 성장하지 않는 사람 옆에서 함께 성장이 멈추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는 그는 나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를 통해 성장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내 공간 안에 매우 가까운 사람을 들이는 일은 이래서 너무너무 중요하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지금은 정말 누구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는 정말 깨끗한 싱글 마인드의 상태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운명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내가 평소 그토록 바라던 책 출판의 기회가 찾아왔다. 포기도 못하고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질질 끌고 있던 나의 프로젝트들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2017년,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느꼈던 그 느낌과 비슷했다. 내게 약속된 미래는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마음. 



우선은 크기에 상관없이 '내 성공'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퍼스널 브랜딩이 되었든, 인스타를 하든, 브런치를 하든 내가 내 인생에서 이뤄놓은 멋진 아웃풋이 있어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억대 연봉을 번다든가, 학력이 좋다던가,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던가, 뭔가 사람들이 '우와'할만한 스펙 같은 것들. 하지만 꼭 그 뒤여야 할까? 지금까지 내가 이룬 내 나름의 성공들을 인정하고, 크기에 상관없이, 악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세상 앞에 내놓고, 지금 내가 심는 씨앗들, 내가 앞으로 어떤 열매를 얻어가는지에 대한 과정을 공개한다면? 그것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되면 너무 좋은 것이고, 처음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도 그 나름의 얻어가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는 인스타에 짤막한 유학 일기를 쓰다가 시작한 글인데, 그 일기가 이렇게 불어나버렸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오랜만에 가슴에서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살아있는 기분. 의도하고 기획해서 쓰는 글 말고, 외부에서 접한 새로운 지식, 감동 스토리, 경험 등을 내 안으로 넣었을 때 그 인풋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나만의 깨달음이 되어 아웃풋으로 나오는 순간이 내 삶의 원동력일 것 같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무엇 때문에 이런 벅차오름이 느껴지는지 아직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양한 이유가 뒤섞여 있으리라. 인풋이 들어가서? 그럼 앞으로 인풋을 계속 넣으면 될까? 아니, 인풋을 집어넣으래야 집어넣을 수 없던 시기도 있었다. 싱글이어서? 이게 이유라면, 앞으로 평생 솔로각이다. 책을 읽어서? 가능성이 높다. 


이 감정을 그리워할 미래의 나를 위해 요즘 나의 일상을 적어보자면, 아침엔 보통 알람 없이도 8시 30분 정도에 일어난다. 학교 과제 스트레스가 있고 연구소에서도 새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업무 부담이 조금 있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설렌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요즘 라면을 끊고, 디저트를 줄이고, 과일 섭취를 늘리고, 가능하면 밥은 요리해서 먹으려고 한다. 싱글이 되었음을 공표하고 나서는 예전에 썸 탔던 사람들에게 연락이 와서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짧은 머리가 이제 제법 적응이 돼서 오늘 나는 내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기회가 생기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움직임을 늘리고 있지만, 본격적인 운동은 하지 않고 있는 상태. 특히 오늘은 좋아하는 옷을 입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패션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에게 잘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보는 내 모습을 통해서 내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최근 한국도 다녀오고, 마요르카도 다녀오고, 집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하기도 하는 등 불안해하면서도 오랜만에 화끈하게 쉬어줬다. 휴식에서 오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쉬는 건 성과 도출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 그리고 일을 하기 싫어지는 마음이 종종 들 때에는 감사한 마음에 집중한다. 나를 믿고 일을 주는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주아주 오랜만에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쓰는 글을 쏟아내고 있다.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보아주실 분들과 내 주위의 모든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마침표를 찍어본다.






모두, 고맙습니다.














글: 노이

사진: Photo by Drew Beam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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