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다시 아프다. 그래서 내일은 출근 전에 병원을 들려야 한다. 의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전날 저녁부터 생각이 많아진다. 독어로 준비하다 영어로 돌아선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상대가 나의 의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있어서 머릿 속에서는 이미 구구절절 설명이 이어진다. 어디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아픈지를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의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가서 적당히 아픈 곳을 설명하고 오면 될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로 어렵게 낸 시간인데 가능한 모든 것을 다 상세히 상담받고 와야 한다는 묘한 압박 사이에서 고민했다.
아프다고 우중충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누워있었더니 갑자기 나가고 싶어졌다. 밤 9시. 보통 같으면 이 시간에 산책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가야 한다고 온 몸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주 드물게 밤 산책을 나섰다. 새 직장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오로지 걷는 행위만을 목적으로 한 산책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함부르크는 요며칠 드물게도 하얀 눈이 잔뜩 쌓여서 깜깜한 밤하늘 아래 대비되는 하얀 눈길이 정말 아름다웠다. 보통 1월초는 어두운 거리를 비추던 크리스마스마켓과 조명들이 많이 사라져서 도시가 우울해 보이기 마련인데 올해는 가득 쌓인 눈들이 그 빈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이어폰도 없이 눈이 쌓인 길 위를 조심조심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잘 준비를 하는 일요일 밤 9시. 공원은 매우 한적했다. 곳곳에 머리는 사라지고 몸만 남아있는 눈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하필 이렇게 좋아하는 눈이 가득 내린 날에 아프다는 건 좀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조용한 밤, 눈길을 걷는 시간은 참 마음에 들었다. 아주 가끔 나처럼 걷는 사람들이 한 두명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눈밭 위를 헤매는 쥐 두마리도 보았다.
새해와 상관 없이 요즘 여러가지로 생각이 많다. 새로 시작한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맞을지, 비자는 어떻게 할지, 이 곳에 계속 사는 게 나을지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게 나을지 안그래도 생각이 많은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2025년도 한 번 각잡고 돌아보고 싶고, 2026년도 기막히게 계획을 세우고 싶은데 어쩐지 계속 몸도 마음도 아파서 잠시 손에서 놓았다.
길을 걷다 보니 그 많은 생각 중에 역시 가장 메인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이직과 비자였다. 한국에 있을 때도 이직은 중요하고 그만큼 스트레스가 따라오는 주제지만, 해외에서는 비자가 함께 묶여있기 때문에 그 고민이 더 커진다. 한국이었다면 당장 그만두었을 직장도 비자 때문에 못 그만두는 상황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고민이다보니 새해 계획과 연결이 될 수 밖에 없다. 새해 목표든 계획이든 아직 정리된 건 없다. 그냥 드문드문 짬이 날 때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끄적여 둔 게 다이다. 왠지 다른 사람들은 다 멋있게 벌써 새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을 것만 같은데 나는 뒤처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바라건대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도 나처럼 눈앞에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아직 2025년도 못 돌아보고 2026년도 어영부영 맞이했겠지. 누군가도 나처럼 새해가 5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새해 목표를 궁리하고 있겠지.
생각해보면 언제까지 작년을 돌아보고 새해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는데, 내 안에는 새해가 오기 전에 새해 목표를 완벽히 세워야 한다는 데드라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나의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환상같은 거다. 아니면 사회에서 주입된 고정관념이거나.
그걸 깨달은 순간, 그 데드라인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정했다. 나는 1월, 이 한달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새해 목표를 세우는데 쓰겠다고. 늦었다는 마음에 급하게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일단 마무리하고 보자, 이렇게 새해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다가오는 새해는 조금 느려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깊이 들여다 보고 싶다. 이 결정부터가 사실 이미 새해 목표의 작은 실천이기도 하다. 드문드문 짬이 날 때마다 끄적였던 생각 중 하나가 '내 속도대로 살기, 내 방식대로 살기'였으니 말이다.
아직 새해 목표도 계획도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나와 함께 1월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어떨지.
글: 노이
이미지: 오늘 다녀온 밤 산책 풍경의 기억을 바탕으로 생성형 AI로 작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