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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Jun 06. 2017

내가 다시 퇴사를 결심한 이유

회사를 안다녀야 행복한 여자

이 글에서 많이 솔직해져보려 한다.
그리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


 살면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힘들기도 하고 그저 그렇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였다.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내가 이걸 왜 참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 끝에는 내가 왜 숨을 쉬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나를 엄습해오면 나에게 그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거기다 하고 있는 일도 잘 안되고, 연애도 잘 안 되는 게 겹치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독일에 오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고, 이제 열심히 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체가 없는 걱정과 고민은 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따라왔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지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있지만, 마음의 병을 얻는 사람은 늘어만 가는 세상. 나는 이미 병들어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형편이 어려운 나라에 태어나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힘들어하는 순간마저 죄책감이 든다. 결국 그 끝은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돌고 도는 악순환.


옛날이었으면 이미 반평생은 산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지금 시대의 기준이면 나는 아직 평균 수명의 1/3도 살지 않았다. 그래도 반평생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누가 내 인생이 100세까지 이어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걸까? 우리에게 주어진 수명을 계속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인 것일까?


 나에게 한국의 현대 사회의 삶은 오래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빨리 죽길 바라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일하다가 얻은 육체의 병을 고치는 데에 남은 시간을 다 쏟고, 지금 행복하지 않아서 미래의 행복을 바라보면서 삶을 늘려가고 있지만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 미래의 행복은 당연히 오지 않는다는 걸 망각한 채 그저 수명만 연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암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암보험을 든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암에 걸려서 내가 치러야 할 비용'에 대비하는 것보다 '암에 안 걸리도록 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게 훨씬 나에게 좋고 효율적인 일인데 말이다. 뭔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걸까? 그렇지만 내 표현에 과장이 있을 수는 있어도,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잠깐 괜찮았던 순간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지냈고,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이 힘든 편에 속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많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데다가, 가끔 정말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의 이유'나 '목적'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해왔다. 그저 주어진 일을 마음 편히 하고,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될 일인데 나는 도저히 그것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시엔 이런 진실을 모르기도 했지만.

 그러다 작년 중순쯤부터 조금씩 하나하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서서히 길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고군분투해온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구나, 라는 보람을 느낄 정도로 성인이 된 후 거의 처음으로 내 인생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게 조금씩 일상이 되어서 최근에는 꼭 시간 맞춰 출근해야 할 곳이 없어도 스스로 일찍 일어났고,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에 대해 신경 쓰기 시작했으며,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고, 명상을 하고, 자연에 감동하고,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 벅찰 만큼 이것저것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된 시기였던지라 수입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있었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거렸다. 나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본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괜찮아진 순간'이 두세 달 정도 이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가 지인에게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내 경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급여였지만, 수입이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달래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 다시 쓸지 모를 경력도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도 풀타임이 아니라 유연하게 쓸 수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좋아 보였으며, 무엇보다 집에서 원격 근무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수입에 대한 욕심만 조금 버리면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 일을 하게 되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집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엄청나게 많이 고민을 했다.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는 것 같아서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힘든 순간


어느 순간부터인지 다시 최대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려고 하는 - 삶에 대한 몸의 거부 반응이 다시 일어나고, 주말이어도 생기발랄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방콕 모드에 찌들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또 다시 왜 사는지에 대한 어두운 질문이 머리속을 헤엄쳐 다니고, 자꾸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내 모습이 상상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어떤 것에 꽂혀서 그것이 원인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지라 예전보다는 제법 능숙하게 대처했다. 웃긴 예능을 보기도 하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오기도 하면서 기분이 너무 다운되지 않도록 조절은 할 수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눈물 나는 하품을 하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시간 때우기를 하다가 겨우 침대로 향했다. 곯아떨어지듯 잠을 청하려는 찰나, 불현듯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 




잠깐만,
이거, 회사 다니면서 일에 찌들었을 때의 내 모습이잖아?



갑자기 머리가 무언가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잠이 번뜩 깼다. 으레 생각하기로 우리는 회사의 문화와 직장 상사나 동료, 선후배와의 관계 때문에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 원인 이전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직 서로 문제를 일으킬 만큼 길게 일한 것도 아닌지라 사람이 문제라고 할 수도 없었고, 재택근무를 하고 있기에 출근 스트레스나 회사 분위기가 문제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회사원이라는 역할 자체가 나에게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내 의지로 시작한 일이 아닌 무언가를 '잘' 되게 애쓴다는 것. 심지어 성공시켜야 하고, 매우 '잘' 되게 애써야 한다는 것. 그것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를 짊어지는 그 '상태' 자체만으로 나는 일을 하고 있든 하지 않고 있든 관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가 조직 문화에 대한 적응과 상사, 동료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끼친다. 그만한 책임감을 느낄만한 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원래 책임감이 강해서', '일할 땐 일만 하는 타입이라'고 하는... 뭐 이런 성향이라서 이런 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친구들이 아주 많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었다. 이 굴레가 내가 빠져나가야 할 1차적 굴레)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명쾌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돌이켜보니 최근에 일을 다시 시작한 그 시점부터 나는 침대에서 다시 '5분만 더'를 외치고 있었고, 명상이나 모닝 페이지는 뒷전이 된 지 오래고, 운동은 당연히 안 가게 되었고, 모든 생활의 밸런스가 흐트러졌다. 처음엔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단계라서 그렇겠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좀 달랐다. 분명 일을 오전에 끝내기로 했지만, 사실상 그러기 힘든 상황이 계속 발생하고, 스스로도 자꾸 일에 몰입하게 돼서 내가 하려는 '내 인생을 위한 일'은 계속 뒷전이 되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나 쉽게 '내 인생을 위한 시간'을 내주게 돼버렸던 걸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 일을 시작하고 싶은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만큼 함께 일해보고 싶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일하는 분위기도 전혀 강압적이지 않다. 이건 내가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겪었던 관성이 나타나는 것뿐일까, 아니면 정말 내가 회사원이 '안 맞는' 사람이라서일까? 



저라고 '회사원'이 체질에 맞아서 하고 있는 건 아닌데요.



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도 알고 있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한국 특유의 과도한 근로 문화'를 가진 대다수의 회사들도 문제지만, 내 인생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나의 태도도 공동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적든 많든 고정적인 일자리를 가졌다는 상황 자체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고, 내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았다. 회사에 충성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그 돈으로 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얼핏 보면 '내 삶'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나를 방심하게 한다. 야근을 해서 힘들긴 해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 내 모습에 뿌듯함도 느낀다. 하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지는 태도가 아니다. 그건 내 '생계'를 위한 행위일 뿐,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내 인생의 진실된 목표와 회사의 목표가 일치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그런 것을 일치시킬 여유 따위 없이 취직이 우선이긴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상실감을 겪기 마련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마음이 헛헛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거기다 돈까지 적게 주면 당연히 더더욱). 물론 한국의 근로 환경, 학업 환경, 육아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위해 생각할 시간을 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도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져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나는 짧고 굵은 또 다른 퇴사를 감행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이전에 이 밸런스를 다시 잘 맞춰보려는 노력은 해볼 것이다. 다분히 개인적인 문제이므로 회사에는 최대한 피해가 없게끔 해야 할 것이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같아 스스로가 바보 같다. 이렇게 될 줄 다 알았으면서 뛰어든다고 객기를 부렸던 건가 싶기도 하다. '이 정도 끈기 밖에 안돼?'라고 생각하기엔 내가 살면서 가장 오래 한 일이 한국 학생으로서의 공부 다음으로 '이 일'이었다. 한국에서 채찍질받아왔던 습관대로, 그저 나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 같다. 




이 정도는 다들 하는 일이야
철없이 굴지마
생계를 위한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늘 같을 순 없는 거야





나도 모르게 스스로 사회의 굴레에 나를 끼워맞추는 나를 발견했다. 놀라웠다. 그것이 철든 행동이라고 자위했지만, 사실은 합리화였다. 심지어 그것을 뒤늦게 깨닫다니.

그렇다고 해도 다시 무일푼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두렵다. 





 나는 아직도 앞이 캄캄하고 보이지 않고 무섭다. 
 어쩌면 평생을 내가 사는 진짜 이유 따위 모르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더 이상 세상이 내게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내가 여기서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혹시 누군가 나와 같다면, 그에게도 간절히 바란다.
 다른 존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수명만큼만 잘 살다가도 우리는 '성공'한 인생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성공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들로 마음을 채우려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나누는 것이 곧 채우는 일임을 스스로 깨닫기를,
 그리고 힘든 순간이 왔을 때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를 잃지 않기를...
 오늘 하루 잠을 잊고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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