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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의 유럽일기 Aug 04. 2017

나는 왜 사는가

8월 3일의 3분 수다 3/7


20대 중반의 나는 일본에 있었다.

때는 극성수기였던 8월.

이 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일본 힐튼 호텔의 어느 한 곳, 라운지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성피로라는 걸 느낄 정도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듯 바빴던 하루하루.

지금은 그 고단했던 느낌도 서서히 잊혀져 기억도 잘 안나지만, 내 뇌리에 박혀 있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



주말이면 탐스러운 디저트가 넘쳐나는 디저트 뷔페를 준비하느라 로비와 키친을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닌다.

여느 주말은 그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다른 생각을 할 정신이 없는데, 유독 생각이 육체를 짓누르고 고래고래 머릿속에서 소리를 쳐대던 날이 있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그 물음은 단순한 의문형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해 왔고 나조차도 처음이 아닌 질문이기에 조금은 거무티티한 때가 묻은 오래된 질문. 쓰러뜨리기가 여간 쉽지 않는 보스급 몬스터였다.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왜 태어난 걸까.






한 두번 던지는 질문이 아닌데도 그 날이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그 날만큼은 아무리 정신없이 바빠도 그 질문이 계속해서 답을 내놓으라며, 그래 마치 시위를 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일이라는 것은 마치 백조 같아서 겉으로는 우아해보여도 그 물밑은 매우 분주하다. 손님들에게 노출되는 로비에서는 아무리 바빠도 뛰지않고 품위를 지키고 걷다가도, 직원들만 다니는 문을 지나 우라(うら, 일본어로 '뒤쪽'이라는 의미)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180도 바뀐다. 마치 전쟁터처럼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멍때리고 있으면 남에게 방해가 되기 십상이다. 휴가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늘 바쁜 날은 더더욱 정신을 부여잡고 있어야 한다. 딴 생각을 하다간 주문을 틀리게 받거나, 애써 옮겨온 새 디저트가 망가질 수도 있다.




그 날도 주방에서 새 디저트를 받아서 수레로 옮기던 중이었다. 로비로 이어지는 문까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로비문을 열면 힘든 표정은 숨기고 미소를 머금은 채 우아하게 걸어가야 하는 타이밍.

그런데 이 놈의 머릿속은 계속 '너 왜 사냐'고 자꾸 퉁퉁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바쁜 와중에도 이런 생각으로 고뇌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처음으로 진저리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큼 간절했고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 나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더 이상 그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그 답을 찾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점점 늪에 빠지는 기분만 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젊은 날의 멋진 고뇌같고 고상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그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신기루 같은 질문이었다고 회상해 본다.

그 때는 마치 내가 왜 사는지 지금 당장 알지 못하면 앞으로를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냥 하루하루를 산다.

과거라는 동굴에서 가끔 후회도 하고,

미래라는 깜깜한 터널을 들여다보려고 애를 쓸 때도 가끔 있긴 하지만,

나는 지금 현재를 그냥 산다.

죽음이 언제나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살아있기 때문에 산다.

인생은 짧고,

그 짧은 인생에서 소중한 하루를 또 얻었다.

왜 사는지를 묻기보다

오늘 살아서 감사하는 일이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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