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남자 친구의 결혼

이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하다보니

by 노이의 유럽일기




금요일 오후 5시. 친구와 쇼핑을 하며 무심결에 페이스북을 훑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와이프가 해준 첫 요리?

남자의 로망 소파에서 TV 보며 맥주?

기특하다며 또 해달라는 포스팅과 인증 사진들...


내 인생에서 첫 남자 친구였던, 이제는 친구인 사람이, 갑자기 '와이프', '신혼스타그램'을 언급하여 깨를 볶고 있었다. 갑자기 멈춰선 나를 향해 돌아보며 친구가 묻는다.



"왜 그래?"



친구의 물음에 향한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자동 반사적인 것이었는지 모를 대답이 불쑥 튀어나왔다.




와 배신감




그랬다.

가장 처음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어는 '배신감'이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그건 아니었다. 시간으로 따져보면 10년도 더 된 일이고, 이제는 아무런 설렘도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감정이 남아있었다면, 배신감보다는 아쉬움과 슬픔이 먼저 날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뭘까. 이 복잡미묘한 감정은. 말로는 배신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지만, 그 내면은 실로 더 복잡했다. 내 머릿 속은 내 뇌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왜 니가 나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았을까'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멀리 있어서? (잠깐, 나 한국 떠날 때 얘한테 연락했었나?)'

'내가 꽤 오래전이긴 하지만 전 여자친구라서 와이프 될 사람한테 미안했나? (근데 어차피 난 못가는거 알텐데)'

'미니멀 웨딩이라도 했나? (그런 트렌드 따질 친구는 아니지만 와이프가 원했다면 가능할지도)'




이런 저런 추리를 하다보니 스스로 납득은 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네가 일부러 나를 서운하게 만드려고 그런 건 아닐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러니 네 의견을 존중해야 맞는 거겠지. 이제 결혼도 했으니 이대로 친구 사이마저 멀어지려나, 조금 슬퍼졌다.



흔히들 남자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 처럼 이야기 하지만, 누구에게든 '처음'이란 건 특별한 단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첫 남자 친구였던 너는, 나에게는 좀 특별했다.




보통은 사귀다 헤어지면 친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너와는 이런저런 일들로 드문 드문 연락을 하며 종종 연락을 하거나 만나곤 했다. 그 모든 걸 겪으면서 우리 사이에 그래도 의리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도 결혼 소식이라도 알려주면 좋았을 것을, 어차피 못가는 상황이긴 하지만 멀리 서라도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아예 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지, 했지만 연락을 안 하기로 마음먹은 건지는 모르겠다. 이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하다 보니 내 기억은 자연스럽게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사람 중에 너는 왜 내 친구로 남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우리가 헤어졌을 때 상처를 받은 건 내가 아니라 너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너를 마주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덜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미안한 마음에 널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설렜다.

너를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아른거려서 좋았다. 연애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손을 잡고 걷고, 투정 부리듯 안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콩닥거리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던 우리였기에, 너와 나의 말과 행동과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가 그저 예뻤다. 내 말이면 뭐든지 다 들어줄 것 같았던 네가 참 든든했었다.



그런 우리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런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처음엔 배신감에 언짢았던 기분도, 이렇게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눈 녹듯 스르르 녹아버린다.



그러면서도 너와 끝까지 잘되지 않은 건, 너와 결혼하지 않은 건 다행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자는 요리를 하고, 남자는 소파에서 TV를 보는 결혼 생활은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에 기특하다는 칭찬 따위를 바랄 나도 아니다.

물론 나도 너에게 꽤 잘 맞는 그런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때의 우리의 만남이 지금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의미 있는 시간과 경험이었기를 바래본다.



이제는 마냥 슬퍼하고 앉아있지만은 않는다.

그게 아마 열아홉의 나와 지금의 나의 다른 점이겠지.



서른이라는 나이는 참 재밌다.

열아홉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들을 생각해야 하고,

열아홉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열아홉의 내가 가졌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엄청나게 뒤흔들리며 '이게 과연 맞는 건가?'라는 의구심에 휩싸인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너도 나도 조금은 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솔직할 것.
느껴질 때 바로 전달할 것.
사랑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라는 걸...



솔직하지 못해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던 과거의 나로부터 배운다.





ps. 너의 결혼 생활이 믿음과 사랑과 함께 행복이 넘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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