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썸남을 만나러 프랑크푸르트로 갑니다
뜬금없이 내 고백을 하자면,
내 인생은 연애를 진득하게 할 수 있었던 삶은 아니었다.
내 사주팔자에 치덕치덕 붙어있다는 역마살이 연애에 들러붙어 있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국내건 해외건 장거리 연애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얼굴을 보기 힘든 연애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
바짝 마른 쿠크다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던 이십 대의 나는
조금만 마음이 아플라치면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잘라내고 도망가기 바빴다.
장거리는 도망가기도 훨씬 쉬웠다.
(근거리 건 장거리 건 상관없이 아주 예민한 감수성도 한 몫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듯이, 연애로 마음이 자꾸 아프니까 연애 관련 글도 찾아보고, 책도 보고, 강연도 봤지만,
인생 고민과는 전혀 다른 문제인지라 사실 속 시원한 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백마 탄 왕자님은 허상이다'
'남자는 다 똑같다'
현실을 바라보라고
그렇게 외쳐대는
꽤 유명한 연사들의 강연은 차마 끝까지 볼 수도 없었다. (보기 싫었다...왜 내 희망마저 앗아가려는 건가)
이상하게도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으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정말 여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서 그런 것일까?
어릴 때는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우리 회사에 어떤 나이 많은 여자 과장님이 있는데,
자기도 생긴 것도 별로고, 가진 것도 없으면서, 그렇게 눈이 높아.
그러니까 여태 결혼을 못하지.'
그렇지만,
소문이 무성한 그 '나이 많은 여자 과장님'을 나는 내 주변에서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실제로 내 주위에 나이가 많은데 결혼을 하지 않은 분들은,
예쁘진 않더라도 매력이 있고,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파트너의 모습에 대해서도 상당히 명확한 그림이 있는 편이다.
게다가 심지어 종종 그런 '이상적인' 인물이 현실에 존재한다.
(최근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빛을 발하는,
전국의 남성들의 질타를 받는 모범 남편감 연예인들은 일단 제외하도록 한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리, 오히려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수록,
주위에서 굉장히 바람직한(?)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멋있는 남편이자 아빠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을 볼 기회가 나에게는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많지는 않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독신주의자였던 나에게도,
'결혼이 괜찮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20대에는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느낌과 운명이라고 믿을만한 것만 찾아서 집착했던 내가,
30대가 가까워질 때쯤에는 내가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이라는 걸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나에게 없는 '희망사항'을 보태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그걸 '이상형'이나 '기준'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원하는 의미를 전달하기가 모호하고,
나는 이것을 '연애의 비전'이라고 부르고 싶다.
인생에 비전이 명확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연애도 비전이 명확해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백마 탄 왕자님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아니, 난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백마 탄 왕자님'을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마 탄 왕자님'을 그리는 건 완벽한 남자를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백마 탄 왕자님'을 그리는 것이다.
누군가의 백마 탄 왕자님은 말수가 좀 적더라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백마 탄 왕자님은 같은 취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만의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려면, 나부터 '성숙한 연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장점'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상대의 장점을 바라보고 사랑스러워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장점'만' 바라보는 건 명백한 실수다.
상대의 단점을 모른 척하다가는 결국에는 더 숨길 곳이 없이 드러나다 곪아서 터진다.
나의 장점만 키우려고 하다가 단점은 숨기거나 바꾸려다 곪아서 터진다.
상대의 단점도, 나의 단점도, 숨길 필요도 바꿀 필요도 없다.
오히려 '단점'에 더 담담한 시선을 둘 줄 알아야 한다.
성숙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두 가지.
하나. '나의 단점'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상대에게 이야기 할 것.
둘. '내가 상대방의 어떤 단점까지 존중해줄 수 있는지'를 알고 인정하고 실제로 존중하는 노력을 할 것.
사랑은 결국 얼마나 '잘난'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지느냐가 아니라,
나의 모자라고 부족한 모습을 얼마나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 해지느냐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원하고,
그런 사람이 나에게는 백마 탄 왕자님이다.
아무리 요즘 세상에 결혼의 기회가 많아졌다고는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짧고,
1년이든, 20년이든,
내 인생의 일부를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백마탄 왕자님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전을 가지고 끝까지 꿈꿀 것이다.
(이 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그 비전도 한 번에 고속도로를 달리듯 시원하게 풀리지만은 않는다.
인생의 비전처럼 몇 번을 실패하기도 하고, 고쳐쓰기도 한다.
감히 말하건대 비전이 명확하다고 해서 절대로 쉬운 길은 아니다.
그렇게 이리저리 힘들어하던 나는 얼마전 업무 겸 여행 겸 다녀온 리스본에서
새로운 연애 비전을 세웠다.
상대의 모습을 원하는 연애 비전이기는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나도 어느 정도 변해야 했기에, 스스로에게도 하나의 도전 같은 비전이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세운 다음 날, 정말 신기하게도, 전혀 기대 하지 않았던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마치 누가 내 비전을 듣고 찾아내서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내민 그를
불신 가득한 마음을 숨긴 채 바라보다 (연애 레벨이 올라갈수록 의심도 늘었다...)
속는 척 한 번 잡아보기로 했다.
뭐, 연애의 시작은 늘 속아주는 것 아니던가.
나는 독일.
그는 스위스.
우리는 중간, 프랑크푸르트에서 내일 만나기로 했다.
+) 새벽 5시 15분 차를 타야 하는데, 밤 12시까지 이 글을 썼다. 망했다.
사귀는 사람도 아니고 썸남의 이야기를 남기려다 잠을 포기하다니.
흑. 잘 되게 응원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