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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어스믹 Jan 12. 2023

이 함바집에선 어떤 디자인을 제일 잘하세요?

어느 디자이너의 회고록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  두 분과 2주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인스턴트라는 모임이다. 책을 읽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모임인데, 나는 이 시간을 매우 좋아한다.

그들과는 디자인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디자인이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매번 만날 때마다 각종 주제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에겐 큰 즐거움이다.

이 모임에서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의 한 구절을 알게 되었다.


온갖 형태의 정신병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무능을 보여준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 -




이 구절을 읽고 나는 자아도취가 심한 편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모든 문제에 시큰둥한 내가 객관성을 잃은 상태는 아닐까.

시큰둥한 이유가 책에서 말하듯 외부 세계에 대한 현실성 있는(객관성) 고찰 없이 나의 내면으로만 생각이 향해있는 것(자아도취)이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나는 무슨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


나는 요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상태이다.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디자인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프리카 여행하려 하는데, 아프리카 비행기는 어디서 타는지, 비행 편은 있는지, 그 넓은 아프리카 중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북부로 갈지, 남부로 갈지, 가서 어떻게 이동할지, 밥은 뭘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서 뭘 하고 싶은지가 있다. 그런데 내가 디자인을 하겠다고 하는 건 이런 세부적인 목표 없이 그저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냥 아프리카를 가고 싶습니다'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과 같다.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디자인과 1학년 입학할 때부터 뭔지도 모르고 '디자인, 디자인'을 말하며 벌써 꽤나 많이 흘렀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디자인은 한글로 표현할 말도 딱히 없다. 그래서 디자이너라는 말도 한글로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서 그 디자이너의 역할이 좀 더 불분명한 것도 있다.

으레 디자이너가 오래 일하게 되면 이것저것 다 해~라는 말을 듣고 내심 안심했다.

나만 갈피 못 잡고 이것저것 다하는 게 아니라, 다들 이렇게 일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는 안심.

하지만 남들이 그런다고 내 마음속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답을 찾기 위해 나는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디자인 생활을 멀리서 떨어져서 보고 싶었다.



내 디자인 인생은 함바다.


내 디자인 생활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비교적 하는 일이 명확한 요리 업계에 빗대어 표현해보고자 한다.


나는 함바 출신이다. 공사장이나 대량 급식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 음식을 대접하는 함바집이다.

어디든 찾아가 어떤 디자인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만든다. 돈가스도 튀기고, 김치찌개도 만들고, 된장국, 계란말이도 만든다.

웹디자인도 하고, 앱도 만들고, 동영상도 만들고, 로고도 만들고, 퍼블리싱도 하는 것처럼.


나는 함바집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함바집을 차렸다.

이유는 내가 함바집에서 공장장도 해봤을 정도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팀 팀장도 해봤으니, 스튜디오 차리면 되겠지 싶었던 거다.

호텔 출신 주방장 밑에서도 배워서 왜인지 나도 호텔 요리도 만들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냥 어깨너머로 배운거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함바집에선 무슨 음식을 잘하세요?라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다.

두루두루 맛있게 잘해야 하는 거지, 함바집에서는 대단하게 맛있는 초밥이나, 최고급 스테이크를 찾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디자인을 잘하세요?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두루두루 잘합니다 하며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다. 제너럴리스트나 올라운더 같은 그럴 싸한 말들을 늘여놓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알맹이가 빠진 사람 같다. 이것저것 다 해보면 능력도 인정받고, 내가 뭘 좋아하는 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다 해보니 그냥 내가 원하는 게 없다는 걸 마주했을 뿐이다.



A : 이 함바집에선 무슨 디자인을 잘하세요?
B: 육천 원입니다.






있어빌리티


그런데 이게 맞나. 내가 원하는 게 이게 맞나 싶은 거다.

그냥 있어빌리티 하게 회사에서 필요한 디자인을 해온 내 디자인 생활이 맞나 싶다.

있어빌리티 하게를 풀이하면 '아무것도 없는 데 있어 보이게 하는 것' 아닌가.

내 디자인 생활은 허세가 단단히 끼어있는 것 같다.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겠다.

그것이 디자인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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