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만 알았던 네로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숙의 푹삶은 이야기 ]
이번 동화는 영국의 작가 위다의 플랜더스의 개를 재창작한 동화입니다.
"그래? "
네로의 얼굴에 환한 기운이 번졌어요.
"그 집에서 재워도 준다네."
친구는 급하게 뛰어와 숨을 헉헉거리며 기쁜 소식을 알렸어요.
"아, 정말 잘됐다."
네로는 두 달째 길거리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따뜻한 곳을 찾아다니는 중이었어요.
처마 밑은 따뜻했으나 집주인이 언제 쫓아낼지 알 수 없었고
공원은 나름 포근했으나 벌레들과 같이 지내는 건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벌레들이 네로를 너무 좋아해서 네로의 몸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먹을 것이라곤 공원에 나무 열매나 떨어진 빵 부스러기뿐이었어요.
다행히 옆 나무 밑에서 지내던 친구가 일자리를 잡아 떠난 지 한 달이 되어,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거예요.
주인집으로 가는 며칠 전부터 네로는 세느강변에서 지내며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빨고 목욕도 정성스럽게 했어요.
"안녕하세요."
주인집 하인에게 이끌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로 갔어요.
네로가 수줍게 말을 건네자, 주인아주머니는 살짝 미소를 지었어요.
"어 반갑구나. 눈이 어쩜 이렇게 똘똘하게 생겼니."
주인아저씨는 책에 열중하여 우리 대화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네로가 맡은 일은 주인아저씨를 돕는 일이었어요.
주인아저씨가 시키는 간단한 심부름과 벽화의 주문을 받는 일, 그리고 화실 정리였죠.
주인아저씨는 낮 시간에는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책에 푹 빠져 지냈어요.
저녁에는 대부분 외출을 하였다가 밤늦게 들어왔죠.
그리고 한번 화실에 들어가면 며칠이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잠도 화실에서 자며 그림을 그렸어요.
주인아저씨는 밝고 다정한 성격이었지만 항상 뭔가에 몰두해 있어서 네로에게까지 다정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네로는 낮에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제 방으로 돌아와서 화실에서 본 물감과 스케치들을 떠올리며 못쓰는 종이에 스케치를 여러 장 그려보곤 했어요.
몇 주가 지났을까. 아저씨는 덥수룩해진 수염과 까칠해진 얼굴로 바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어요.
이제부터 화실의 시간은 네로에게 주어졌어요.
네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고요. 네로는 다 드신 빈 찻잔과 빈 접시를 부지런히 치웠어요.
그리고 열려있는 물감과 더러워진 팔레트를 치웠어요.
팔레트를 씻으면서 손가락에 붉은색 물감을 묻혀서 손등에 쓱 그어보았어요. 푸른 색도 한번 만져보았어요.
어릴 적 배달하던 우유보다 더 말랑하고 파트라슈의 털보다 더 부드러운 촉감이었어요
바닥에 밀대질을 마치고 커튼 뒤 작은 방을 청소하러 들어갔어요.
커튼을 걷자마자 환한 빛이 쏟아졌어요.
그것은 바로 주인아저씨의 그림이었어요.
네로가 제일 좋아하는 루벤스의 그림과 많이 닮아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환한 불빛을 받고 있는 여성과 아이의 모습이었어요.
여성은 불안한 표정이었고 아이는 불편한 표정이었어요.
네로는 그 그림에 영혼이 뺏겨버린 사람처럼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었어요.
"마음에 드니?"
갑자기 나타난 주인아저씨에 말에 네로는 깜짝 놀라서 뭐를 훔치려고 하는 사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죄, 죄송합니다."
"아니다. 내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그 그림 앞에 서 있으니 그림이 맘에 드나 해서."
"네. 빛이 아름다워요."
"과연 그럴까? 저 여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데이아라는 마녀다.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저 그림에서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어."
"웩."
네로는 자기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어요.
"그래도 이 그림이 아름답니?"
아저씨는 흥미롭다는 듯이 질문을 했어요.
"그림은 아름답지만 저 여자는 싫어요."
네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신 저 여인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어요.
"소년아, 저 여자만 마녀는 아니란다. 홍차 한잔만 갖다 주렴. 음악회 갈 준비를 서둘러야겠구나"
주인아저씨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어요.
'얼굴도 못 본 엄마지만 우리 엄마는 분명 저런 모습은 아닐 거야.'
네로는 아저씨의 준비를 돕는 내내 생각에 빠졌어요.
'아저씨는 저렇게 멋진 재주를 가지고 왜 저런 흉한 그림을 그리는 거지?'
네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어요.
"주인님, 제가 며칠만 고향에 다녀올 수 있을까요?."
몇 달 동안 즐겁고 고되게 일한 네로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자리라 급여는 많지 않았어요. 네로는 알뜰히 돈을 모아 오늘을 준비했어요.
프랑스에서 플랜더스로 가는 여정은 멀었어요. 플랜더스는 네로에겐 할아버지와 파트라슈 그리고 아루아를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었지요.
동시에 할아버지와 파트라슈를 잃은 아픔의 장소이기도 했어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플랜더스이지만 꼭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어요.
네로가 대성당에서 파트라슈와 쓰러져있었을 때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었지만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날 수 있었어요.
오랫동안 입원한 네로는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세상에서 전부였던 할아버지와 파트라슈를 잃은 슬픔과 마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로 매일 남모르게 흐느껴 울었어요.
밝고 꿋꿋한 네로였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우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었어요.
병원비를 낼 수 없었던 네로는 덜 나은 몸을 이끌고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어요.
'의사 선생님, 꼭 돈 벌어서 다시 돌아올게요.'
네로는 도움을 준 의사 선생님께 죄송했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병원비를 갚을 능력이 전혀 없어 마음의 약속을 하고 프랑스로 떠났던 거예요.
다시 플랜더스로 돌아온 네로는 밀린 병원비를 내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어요.
'이랴, 이랴, 어어어어어'
길을 건너던 네로는 빠르게 달려오는 마차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어요.
"뭐냐 너는?"
화가 난 듯 툴툴거리며 마차에서 내리는 이는 바로 아루아의 아버지 코제 씨였어요.
네로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이 아팠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보게 된 것이 더 아팠어요.
"뭐야, 도망친 네로 아니냐. 너 일부러 내 마차에 끼어들었지?"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그때 호각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이 왔어요.
"사람을 치였으니 경찰서로 가셔야겠습니다. 소년은 내가 병원으로 데려다 주마."
경찰은 네로를 일으켜 세웠어요.
"아니 저 소년은 멀쩡한데 내가 왜 경찰서를 가는 거요?"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은 법에서 가장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경찰은 엄한 표정으로 코제 씨를 체포해갔어요.
'안 그래도 병원 가는 길이었는데 마차를 타고 가게 되다니 잘됐네.'
네로는 다리가 욱신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이렇게 다시 와줘서 정말 고맙다. 네로. 안 그래도 네 소식이 궁금했는데. 지난 병원비는 안 줘도 된단다. "
의사 선생님은 반가워하며 오늘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어요.
"꼭 드리고 가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 맘이 편할 것 같아요."
"그럼 이번 병원비를 안내는 조건으로 지난 병원비는 받도록 할게. 상처가 깊어 며칠 병원에 묵어야 할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네로가 입원실에서 하루를 지내고 나자 경찰이 다시 찾아왔다.
"아까 너를 치인 그 아저씨는 지금 감옥에 있단다. 그 전에도 몇 명에 아이들을 치고 그냥 도망가서 중범죄가 되었다.
경찰서로 같이 가서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겠니. 잠깐이면 된단다."
"네."
네로는 덜그럭 거리는 마차 안에서 오랜만에 자신의 상처를 유리창에 비춰보았어요.
어른들의 차가운 시선과 무시하는 말투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어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어린 네로는 알 수가 없었죠.
그저 숨죽여 울고 고단하게 하루하루를 견뎌낼 뿐이었어요.
경찰서에 도착하자 거기서 하룻밤을 지낸 코제 씨가 감호소에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그동안 내가 오해한 부분은 정말 사과 하마. 안 그래도 네가 돌아오면 사과하려고 했단다.
네가 떠난 뒤에도 내 방앗간 여러 곳에서 불이 났어. 네 탓이 아니란 걸 그때 알았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코제 씨는 감호소에서 다급하게 소리를 쳤어요.
"네로, 이제 괜찮다고 부딪히지 않았다고 얘기해주렴. 넌 아로하의 친구잖니."
코제 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미 시간이 지나버린 기차표 같은 사과였어요.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는 것이었죠.
"코제 씨가 마차로 저를 치인 건 사실이에요."
네로는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게 한 코제 씨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경찰 아저씨, 코제 씨에게 선처를 베풀어 주세요."
" 왜 용서해주려고 하지? "
경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한 듯이 말했어요.
네로는 주인아저씨의 집에서 본 아이를 안은 마녀의 그림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주인아저씨의 말도 떠올랐어요. '소년아, 저 여자만 마녀는 아니란다.'
문득 자기 속에도 마녀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제 씨가 자기를 괴롭혔을 때 코제 씨가 안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랫동안 네로의 마음속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코제 씨가 죽었으면 싶을 때도 있었고요.
"코제 아저씨의 행복은 빌지 않더라도 최소한 잘못되길 바라는 마음은 이제 제 마음속에서 없어졌으면 해요.
제 마음이 불편해져서요."
"정말 괜찮겠니?"
경찰 아저씨가 걱정스럽게 물었어요.
"용서는 할 생각이 없고요. 용기가 생겼어요. 제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힘이요."
네로는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짐들을 다 내려놓은 것 같았어요.
갚지 못한 병원비로 빚진 마음도 코제 씨와 마을 사람들을 미워하는 감정도 이제 플랜더스에는 더 이상 없었어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어요.
"저 이제 가봐도 되나요? 하루가 늦어져서 주인아저씨가 기다릴 것 같아서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더 받아야 하지 않겠니?"
경찰 아저씨가 말했어요.
"제가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제가 사과해야 할 마녀 아주머니도 있고요. 또 제가 그릴 그림도 아주 많아요. "
네로는 들뜬 목소리로 말한 후 경찰서 문을 활짝 열고 나갔답니다.
1. " 괜찮아, 파트라슈, 괜찮아, 조금씩 달라질거야."
영국의 작가 위다(1839-1908)가 쓴 동화 '플랜더스의 개'에서 '플랜더스'는 지금의 북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아우르는 북쪽 지역으로 브뤼셀과 안트베르펜등의 도시가 위치하고 있어요. 그중 안트베르펜(원어로 앤트워프)은 벨기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위다의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어요.
작품의 마지막에서 네로는 안트베르펜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걸린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아래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영원히 잠든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요.
네로가 어린 나이에도 가혹한 인생을 살다가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스토리는 많은 독자들이 200년 이상 파트라슈와 네로의 비극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다시는 네로에게 행복해질 시간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어요. 이번 이야기를 통해 네로가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설정을 통해 네로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플랜더스라는 지방은 세 나라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필자는 대성당이 있는 안트베르펜을 특정하여 네로의 고향 무대로 삼았어요. 하지만 안트베르펜이란 지명은 생소하여 널리 알려진 '플랜더스'라는 지명을 사용 했어요. 재창작 소설에서는 네로가 플랜더스를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됩니다. 실제로도 벨기에와 프랑스는 접경지역이라 어린 네로에게도 이동 가능한 지역이었죠.
프랑스 파리는 네로에게 고단하지만 상처가 되지 않는 도시가 되길 바랍니다.
2. " 내가 그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할 텐데."
원작에서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네로의 마지막도 루벤스의 그림 아래였어요. 루벤스(1577-1640)는 바로크 시대 플랜더스 지방에서 가장 명망 있는 화가예요. 빛나는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찬 17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죠.(네이버 백과사전) 루벤스는 명성에 걸맞게 램브란트, 들라크루아 등의 후대 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어요.
'플랜더스의 개'가 쓰인 시기는 19세기 루벤스가 살던 17세기와는 시간적으로 거리가 멀어, 재창작 동화에서는 네로가 프랑스로 옮겨간 후 들라크루아를 만나게 됩니다. 들라크루아는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루벤스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 그 화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네로가 그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도 루벤스의 작품처럼 금방 매료되고 맙니다. 본 작품에서 '주인아저씨'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들라크루아를 모티프로 한 인물이에요.
들라크루아는 '문학적인 화가'로 많은 문학작품을 자신만의 색채로 재해석하여 미술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본 작품 내에 주인아저씨의 모습도 항상 책을 들고 작품에 몰두해있는 모습이지만 때로는 댄디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가진 인물로 그리고 싶었어요.
이제 네로도 당대 최고의 미술가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화가의 길에 한 발 다가서게 됩니다. 아직은 어깨 너머로 배우는 단계지만 미술 실력과 열정은 비범하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 네로도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성장하길 기대해 봅니다.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용기가 생겼어요. 제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힘이요."
심상의 이동 <용서가 아닌 자유>
프랑스에서 다시 플랜더스로 돌아간 네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과거인 코제 씨를 만나게 됩니다. 네로는 코제 씨를 처벌하는 선택에 순간에 주인아저씨의 화실에서 본 작품을 떠올립니다. 바로 네로가 '마녀 아줌마'라고 부르는 작품, 들라크루아의 '격노한 메데이아(1862)입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비극 작품 중 메데이아의 남편 이아손이 왕의 딸과 사랑에 빠지자 왕의 딸을 독살하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마저도 죽이게 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려졌어요.(네이버 백과사전) 이러한 메데이아의 야만적인 폭력성은 악마, 마녀 등 특정 캐릭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로도 자기 마음에 존재하는 분노, 미움, 질투의 불길을 알아챘어요. 하지만 네로는 용서도 복수도 아닌 '털어버림'을 선택합니다. 네로가 약해서라거나 착해서 선처를 베풀었다기 보단 자기 자산이 불편한 마음이 되는 것이 싫어서 자기 안에 살고 있는 미움을 그저 보내주려 하는 겁니다. 단순한 선택이지만 가장 현명하고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네로의 순수함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