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글
주말을 혼자 보낼 때 문득 느끼는 건, 외로움
승진 축하 파티에서 승진 좌절된 사람이 느끼는, 소외감
열심히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갑자기 찾아오는, 공허함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안 순간, 쓸쓸함
이 감정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을 때가 아니고 주관적으로 나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고(고립) + 쓸쓸한 감정(불쾌)을 가질 때 일어난 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멜빈 시먼(Melvin seeman)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크게 영향력이 없다고 느낄 때, 곧 무력감과 무의미성에 시달릴 때 소외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이 동떨어진 느낌은 통증을 만든다는 것이다. 몸이 아플 때 통증을 느끼는 뇌부위와 외로움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부위가 같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외로움이 얼마나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가가 증명되기도 했다.
지금부터 이런 종류의 감정을 통칭하여 외로움이라고 사용하고, 이 글 하나로 외로움을 간단히 물리치는 법을 알아보도록 하자.
외로움에는 '몸부림친다'라는 표현을 붙인다. 몸을 이리저리 꼬고 뒤쳐야 할 만큼 견디기 힘들고 처리가 안 되는 감정이라는 뜻이다. 이 고통을 없애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외부에서 극복 방법을 찾으면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귀기, 소중한 사람 챙기기 등 대상과 분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항상 대상이 필요하게 되고 외로움을 해결해 줄 대상에 의존하게 된다. 그 사람, 그 방법이 없으면 허전해서 더욱 의지하는 악순환을 만들고 점점 외로움에 취약한 사람이 된다.
또 다른 극복 방법은 '외로움을 즐겨라, 외로움은 동반자‘라며 자신을 달래는 것이다. 물론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고통이 찾아왔는데 즐거움 혹은 아무렇지 않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 없이 쉽게 즐거움으로 바꿨을 것이다.
외로움 해결을 위해 종이에 외로움을 그려보자. 주제는 ‘파티에서 외로움을 느낀 나’이다. 대부분의 경우 종이 한 구석에 나 혼자 쭈구리된 모습으로 그린다. 그때 꼭 다리는 구부리고 , 얼굴에는 표정이 없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이라면 사람들이 나를 외면하거나 매몰차게 쳐다보는 모습, 나 빼놓고 자기들끼리 즐겁게 노는 모습을 그린다. 그림 속 나는 어둡고 쓸쓸하게 표현되어 있고 주변은 밝고 천진난만한 빛을 내고 있다.
만약 내가 외로움을 느낀 파티를 사진으로 찍는다면 저 그림과 같은 모습일까? 사진 속 모습은 일반적인 파티 조명과 음식 그리고 웃는 사람 몇 명, 무표정한 사람 몇 명이 보일 것이다. 어쩌면 나만 혼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모른다. 그게 전부다. 어디도 쭈그러진 사람이나 한쪽만 밝게 빛나는 조명은 없다.
위의 그림과 사진의 차이에서 보듯이 외로움 버튼이 눌러지면 유독 현실과 다른 모습으로 현실을 느낀다. 즉, 상황의 왜곡이 심해진다. 타인의 미소가 비웃음으로 보이고 모두가 나를 외면한 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내가 베베 꼬인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그렇게 보는 걸까.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학습의 결과로 무리를 이루면 외부의 적으로부터 더욱 안전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고, 유전자에 그 정보를 실어 후대로 전송한다. ‘무리 우선 유전자’를 받은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면 뇌에서 위협의 신호를 보낸다. '무리 이탈 신호가 잡히니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다. 위험 경고이니만큼 강력한 신호로 고통을 전담하는 뇌부위를 활성화하게 된다. 상대의 매몰찬 표정, 모임에서 나만 초대 못 받음, 연인의 이별 통보 등 수많은 관계의 어긋남에서 무리 이탈 신호가 감지된다. 최근에는 내 글만 조회수 없음, 내 사진만 좋아요 없음 등 새로운 온라인 관계가 많아진
만큼의 더욱 많은 경보가 울린다.
하지만 이 신호는 성능이 크게 좋은 것 같지 않다. '무리 이탈 신호가 잡히니 상황을 냉정히 파악해서 처리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탈 신호다! 무조건 나를 보호해.'라는 명령을 보내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하라'는 지령에 따라 평소보다 과하게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띠게 되면 세상을 비추는 내 마음의 거울에 온통 나로 가득 차버린다. 내가 너무 커져서 작은 결점도 잘 보이고 마음에 난 작은 구멍도 덩달아 커져 구멍으로 바람이 아니라 태풍이 지나가는 상태가 된다. 거울 속에 내가 커진 만큼 세상의 모습은 작아진다. 나와 세상의 비대칭이 생겨 타인의 행동과 의도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왜곡이 일어난다. 나의 아픔에 대비되어 타인이 과도하게 행복해 보이거나 타인의 의도가 왜곡되어 일부러 나를 소외시키려 한다, 나를 미워한다 등으로 부정적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무리 이탈 신호는 안타깝게도 무리와 조화를 이루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대감을 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외로움은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자료에서 외로움은 통증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뻔한 외로움 극복법은 나에게 안 통했다. 사람들에게 터놓기엔 나 자신이 너무 찌질해 보였고 그들도 답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답이 있든 없든 외로움은 갑자기 찾아와 원펀치, 투펀치를 날렸고 그 펀치의 전율에 몸부림을 쳤다.
더 무서운 건 외로움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짙어질 녀석이라는 점이었다. 나이가 들어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면 깊어질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외로움을 상상해 보면 1년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 한 칸에 누워 티비를 보는 늙고 아픈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상상은 고통이라기 보단 블록버스터급 호러 무비다. 주연 한 명에 출연자 없음 촬영진 없음 관객 없음. 먹기, 자기, 티비보기의 무한 반복 스토리를 20년 동안 상영.
하지만 외로움의 정체는 생각만큼 대단한 놈이 아니었다. 뇌의 신호에 따라 '내 생각 밖에 하지 못하는 상태'일뿐이었다. 외로움이 찾아온다면 현실이 바뀐 게 아니라 ‘거울이 잠시 나로 가득 찼구나 '라는 걸 기억한다. 내가 자기중심적 상태에 빠진 걸 알기만 해도 원래 크기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 문제의 원인과 방향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타인과 조화를 이루고 상황을 균형 있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원할 때는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고 혼자 있어도 주변을 왜곡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잠깐 그러지 못했다고 그 능력이 없어지지 않는다. 자책할 필요도 없다. 외로움과 친구 할지 말지도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쫄지 말자. 별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