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범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 불안

by 이이름

[산문]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인문] 불안. 알랭 드 보통.




너무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 않다. 내 인생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랬을 때 초라해지는 건 무조건 내 쪽이다. 비교가 반복되면 패배감이 쌓이고 이 패배감은 무의식 중에 우리를 사로잡아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악이 된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는 운명을 탓할지언정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좀 적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 시대가 더 좋았다는 건 아니지만, 잦은 패배의 감각과 설익은 승리의 감각이 지배하는 현대의 신분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강하게 우리를 옥죄고, 그것들은 일상에 피로로 누적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위계를 더 잘게 나눠 한 칸이라도 더 높은 곳에 자리하려는 노력은 내면화한 패배감 속에서 승리자가 되려는 몸부림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사고와 노력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있다. 문이 완전히 닫혀 있는 게 아니다. 그 희망의 존재 여부가 이전 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세상을 우리에게 열어줬다는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얼굴을 숨긴 채 우리를 지옥 같은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인식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에 대한 인식 차이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정치는 필요하고 이런 대립은 건강하게 세상을 이끌어 간다. 어느 쪽 입장을 지지하든, 입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건강하게 한다.


나는 세상을 건강하게 하는 사회인으로서 이 특별한 인생 이야기–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를 읽었다. 읽으며 자주 들었던 감정은 ‘부러움’이다. 중요한 건 ‘질투’가 섞이지 않은 부러움이라는 점이다. ‘급’이 다르면 애초에 질투가 싹트지 않는 법. 오를 수 없는 벽은 올려다보지도 않는 법이다. 과거의 신분제 사회를 지배하던 법이 현대 사회에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내면에서 철저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음악가가 쌓아 올린 음악적 업적이 그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왔다. 그가 하는 활동은 그 자체로 예술이고 그가 사회에 대해 가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면 그 말은 의미를 담고 세상에 퍼진다.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하고, 자신의 작업을 위해 수십 명 단위의 회사가 움직인다. 일이 없을 때는 세계의 수도 뉴욕에 자리한 자택에 머무르며 우주에 대해 사색한다.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 감독들, 유수의 음악인들과 만나 또 다른 예술을 창조하고, 미술제의 기획자가 되기도 하며 영역을 넘나 든다. 그러니 이 사람이 하는 활동 자체가 예술이다. 젊은 시절에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는 고백도 어쩐지 예술가의 기질을 보여주는 것 같아 예사롭지 않다.


예술가는 멋있다. 이 사람도 그렇다. 이 사람의 일상에는 구질구질한 게 묻어 있지 않다. 돈 몇 푼 때문에 감정 상할 일이 없다. 생계에 대한 불안으로 찌들 일이 없다. 그럴 시간에 더 큰 것을 생각한다. 의미를 찾고 창작을 이어간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도 음악을 생각하는 이 예술가에게서 범인(凡人)들은 숭고함을 느낀다. 그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보다 더 많은 양의 슬픔을 획득한다. 죽어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력이 예술가를 멋지게 만든다.


이 특별한 사람들에게 향하는 부러움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그들이 이뤄놓은 부와 명예 같은 자산을 향한 것일 수도 있고,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일 수도 있다. 혹은 거기서 생기는 권력을 통째로 갖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들이 지닌 재능과 감각 자체를 가장 염원할 수도 있다. 내가 자주 느꼈던 ‘부러움’에는 당연히 이런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세속의 일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가진 ‘자유’가 부러웠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스스로 이 예술가에 비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가, 하면 세속의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일상에서 해결해야 할 자잘한 문제들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의 시간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안에서 발생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노동 이외의 시간에 처리하고 해결해야 한다. 나는 그것들이 아주 피곤하다.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아주 마음을 놓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하면 생계를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육박해 온다. 일분일초 눈코 뜰 새 없이 항상 바쁜 건 아니다. 여유롭게 취미를 즐길 때도 있고, 당연히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얽매어 있다는 감각은 한시도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지닌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한 삶이고 그렇게 얻은 일상인데도 어딘가 너무 빡빡하고 답답하다. 진정 자유롭게 살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런 삶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비슷한 고민 끝에 한국인들은 답을 찾았다. 이 ‘자유’라는 건 ‘경제적’으로 먼저 달성해야만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구나! 이 지난한 노동과 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획득해야 할 것은 바로 ‘경제적 자유’였던 거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워질수록, 문화와 예술이 여가 시간을 더 풍부하게 할수록 ‘경제적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가시적으로 대두된다. 파이어족들의 포트폴리오와 성공한 투자자들의 투자 법칙이 명언처럼 회자된다. 이 현상의 기저에 깔린 욕망은 아주 심플하다.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뿐이다. 쉽게 말하면 놀고먹으며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고 싶은 거다.


놀고먹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다고 하면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그건 대다수의 꿈이다. 우리 모두가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게 만든 ‘역사’와 ‘구조’에 집중하는 대신 ‘개인’들이 찾은 답이 바로 ‘경제적 자유’다. 몇 번의 보름달을 더 볼지 알 수 없는 이 짧은 일생에 노동만 하다 죽고 싶진 않다는 거다.


물론 예술가들이 놀고먹으며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산다는 얘기는 아니다.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예술가보다 처절하게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의 수가 더 많을 거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부러움은 모든 예술가를 향한 것이 아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성공한’ 예술가에 한정된다.


그 사람과 같은 삶을 사는 건 선택된 소수뿐이다. 그들이 선택되는 과정에 숱하게 뿌려져 있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서사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노력하고 성장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이야기가 끝없이 변주되는 와중에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자신을 채찍질하거나 노력 없이 쉽게 얻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처한 (그리 특별할 것 없는)현실을 수긍해 버린다. 예술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선대에게 물려받은 기업을 유지하는 재벌 2세 3세건 재테크를 통해 자산가가 된 투자의 귀재건 어렸을 때부터 힘든 훈련을 거쳐 스타가 된 아이돌이건 모두 존경받는다. 그들이 흘린 땀과 깊은 고뇌는 충분히 이해받는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과 나의 차이를 인정해 버리고 극복할 수 없는 한계선을 그어 놓고, 그 아래에서 경쟁한다. 언제나 우리의 노력은 부족하고, 나태한 인간은 세상에 불만 따위 터뜨릴 자격도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입을 열었다가는 북한으로 가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이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는 각자의 입장이 있을 거다. 그런데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노력은 그 정도 가치밖에 안 되나?


특별하게 특출 난 사람들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술은 하는 사람이 하는 거다. 예술로 생계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면(혹은 어쩔 수 없이 그게 불가능하게 된다면) 더 가볍고 부담 없이 창작하고 놀 수 있다. 허접할지언정 나름 이렇게 글도 써보고,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서 벽에 걸어두는 것도 예술 활동이다. 단지, 그런 활동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인생을 살지는 못할 뿐이다.


그런데 특별한 인생은 무엇인가?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사는 게 특별한 인생인가? 어떤 면에선 분명히 그렇다. 아무나 그런 삶을 살지는 못한다. 그런데 그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다. 얼마나 특별하든 나의 인생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남의 인생은 나에게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나에게는 특별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나의’ 인생만 남는다. 나는 나의 인생만 대면하며 살아가야 한다.


현재 나의 인생은 적잖게 구질구질하다. 세속의 일들이 파놓은 불안의 구덩이에서 한발 한발 겨우 내디딘다. 그 와중에 나름 예술을 한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고 아무도 예술이라고 생각지 않고 아무에게도 가치를 발생시키지 못할 뿐.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나름 이것도 예술하는 삶이다.


경제적 자유를 향한 사람들의 발버둥이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한 건 최근이다. 그전에는 자기만 잘 살려는 이기적인 발상이라고 폄훼했다. 제도와 정치를 통해 바꿔나가야 하고 토론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제 알 것 같다. 사람들은 불안한 거다. 나랑 마찬가지로 일이 하기 싫은 거고 더 많은 여유 시간을 이용해 행복해지고 싶은 거다. 욕망에 삼켜져 버린 괴물이라기보다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어린아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불안할수록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대상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불안한 미래, 경제적 공포, 삶의 무의미에 집중할수록 길은 더 보이지 않고 불안은 복잡해져만 간다. 우리를 그 미로에서 구해내는 건 예술이다. 하고 싶은 것 하고 그리고 싶은 것 그리고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는 게 중요하다. 스스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을 하는 거다. 생계에서 벗어나, 직업 활동 말고, 미래를 대비하는 종류의 ‘투자’ 말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삶이 활짝 열려있는 듯 느껴지는. 남이 만들어 놓은 것과 비교할 필요 없이 자족적이고 자폐적인. 그런 개똥철학 같은 예술. 그럼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예술가의 삶을 살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인생에 그 예술 활동은 ‘특별함’을 남긴다.


나는 인기 연예인을 ‘셀럽’이라며 특별 대우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스타’라는 말 자체를 우습게 여긴다. 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처럼 그들을 우러르고 싶은 마음인 건가. 우러를 대상이 필요한 건가. 그 말을 갖다 붙인 사람들이 살던 시절에는 관찰할 수 있는 별이 소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별했겠지. 그러나 반짝이는 별은 특별히 선택된 몇몇이 아니다. 관측되지 않았을 뿐. 이제는 볼 수 있지 않나? 저 별무리 속에 특별하지 않은 별이 어디 있고 특별한 별이 어디 있나. 우리는 각자에게 특별한 인생을 살면 되는 거다. 그러기 위해 부러워만 하지 말고 싸울 일이다. 주 4일, 주 3일 노동하는 삶을 꿈꾸면서.


star.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