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9.
이쯤에서 이 프로그램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기획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은 이들의 기획의도와 실 제품의 간극 사이에서 발생한다. 홈페이지에는 프로그램 기획의도가 아주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안에 우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고민하고 논의해볼 만한 문제점이 담겨있다. 논란으로 소비하고 버려질 자극적 이슈가 아닌,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 깊이 닿아 있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중요한 논의 거리다. 그중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 있다. 기획의도에 쓰인 말 중 ‘사랑을 찾기 위해’가 그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사랑’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선뜻 동의가 되는가? ‘결혼할 대상을 찾기 위해’ 정도였다면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감춰져 있다. 프로그램을 보는 모든 시청자가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내용이다. 이 문장은 ‘솔로 남녀들이’ 앞에 묵음으로 처리되어 숨겨져 있다. 제대로 쓰면 이렇다.
‘소득 수준, 자산, 직업,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비전, 외모 등 흔히 스펙이라 부르는 조견표(Specification)에 상등품(上等品)으로 찍혀있는’ 솔로 남녀들이 모여……
이 프로그램을 볼 때면, 출연자들과 비슷한 또래면서 결혼을 간절히 원하지만 스펙이 상(上) 등급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조견표의 모든 항목이 중간 이하인 사람들과 그들의 부모는 이 프로그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감정을 느낄까.
우리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세계란 원래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라고 학습해 온 까닭에 뭐가 문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무비판적으로 일상화된 구별짓기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당한 철면피의 언설로 비수처럼 날아든다. ‘계급은 성취하는 것’이라거나, ‘계급은 구시대적 관념’이라는 식으로. 결혼 시장은 철저히 계급의 논리를 따르고, 그 계급의 성취 과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이나 뛰어난 외모를 지닌 출연자가 나올 때마다 프로그램 사회자들이 ‘의식적으로’ 감탄사를 뱉는 모습을 제작진은 편집 없이 '의식적으로' 방송에 내보낸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계급적 차별을 강화한다. 그들이 대변하는 시청자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르는데, 마치 그들은 시청자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군다.
연애와 결혼 시장은 구별짓기의 장이고 계급의 철저한 위계 속에 존재한다. 그 어떤 영역보다 더욱 공고하다. 오래된 전통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상위 계층끼리의 짝짓기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 더 다양한 계층,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이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나. 누군가 배제되는 건 당연한 일인가?
결혼정보회사(결정사)가 조견표에 따라 사람을 등급 별로 나눠서 중매하는 시스템은 결혼 시장의 본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사회 구성원 다수는 결정사 등급표의 하위 등급에 해당한다. 이 등급표는 ‘우연히’ 공개되어 이슈가 된 뒤에 사라진다. 몇 년이 지나면 새롭게 바뀐 등급표가 또다시 우연히 공개되어 주목을 끈다. 마치 새로운 계급의 기준표가 대중에게 공표되듯이. 나는 어디쯤 해당하나 하고 나의 등급을 찾는 순간, 우리는 완벽하게 스스로를 대상화한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이 등급표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등급 외’ 사람들이 실재하는 세상에는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했을 때 이들의 사업 방식은 도덕적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차별을 확대 재생산하여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결정사는 한국이 선택한 체제의 규칙 내에서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 일개 기업들에 불과하다. 법과 제도를 지키는 한 없앨 수 없다. 영향력의 범위도 비교적 미미하다.
「나는 SOLO」는 다르다. 방송은 공공재인 전파와 시스템을 이용해 일반 대중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결정사처럼 기업의 의무만 다하면 뭐든 다 해도 되는 게 아니다. 혹여 등급표를 감춰둔 것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시청자는 프로그램을 없앨 수 있다. 그게 결정사와의 차이다.
제작자의 고충도 짐작은 된다. 계층을 섞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의 지원 자체가 적을 수 있다. 경제적/신분적 조건을 숨기고 하는 중매는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걸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라 할 수 없듯이, 사회적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배제하도록 하는 이런 방송 환경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 구별짓기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출연자 선정, 계급적 환상을 당연시하는 자막, 대사, 편집. 묵음으로 등급 외 처리된 구성원을 못 본 체하고 그대로 방치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방송은 ‘결정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의도에 쓰인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장 메커니즘과 계급의 테두리 내에서 조건화되어 거래되는 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동경하고 숭고하다 여겨왔는데, 보통사람들은 다다를 수 없고 이상적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숭고하다 하는 것인가? 이런 류의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목적을 사랑이라 불러도 문제없는가? 우리는 그것을 불편함 없이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니까 진짜 논의해야 할 문제는 이런 것이다. 출연자들이 서로 고소하고 유튜버가 되고 사업을 하고 어쩌고 하는 신변잡기도, 대본이 있네 없네 하는 진정성 문제도, 그리 심각한 논의거리는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이 이런 틀 안에 존재하는 게 괜찮은지를 토론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계급적 구조를 강화하는 이런 류의 프로그램이 ‘사랑’이라는 말을 전유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해야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들(모태솔로)만 모아 놓고 진행한 회차였다. 두 명의 남성이 한 여성에게 구애한다. 여성은 두 남성과 번갈아 데이트를 하며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이 세 사람은 거주 지역이나 조건이 비슷하다. 여성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흔히 말해 잘 맞춰주는 타입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두 남성 모두 최선을 다하지만 성향의 차이는 있다. 첫 번째 남성은 여성보다 나이가 꽤 많다. 안정감과 리더십이 있어 보이지만 다소 강압적인 느낌도 든다. 두 번째 남성은 누구와도 편하게 대화하는 사람이다. 말이 많고 가벼워 보이는 면도 있지만 상대방을 편안하게 한다. 이들이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면 시청자는 느낄 수 있다. 이 여성이 두 번째 남성과 있을 때 밝게 웃고 많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을. 첫 번째 남성과 있을 때도 밝기는 하지만 어딘가 억눌린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카메라는 여성이 고민하는 모습을 관찰하는데 그 속 마음까지는 담을 수 없다. 그리고 최종 선택의 순간. 여성은 곤란한 얼굴을 한 채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다. 방송이 종료된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촬영이 끝난 후 여성이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과 옆에서 그녀를 위로하는 두 번째 남성의 모습이 나온다. 그 눈물은 무엇인가. 여성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마음을 대면하는 순간의 혼란과 후회가 표정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어서 후일담 촬영분이 공개되는데, 얼마 후 선택의 장소에 돌아와 선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종 이와 같은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의 경이감. 부족하고 결핍으로 가득한, 그런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동질감.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발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 '진짜' 리얼리티의 순간.
이런 성찰적 순간들도 존재하기에 이 프로그램을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다. 다만, 개선은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극적인 이슈 생산에 몰두하기보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사랑’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고 파고들 수 있다면,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가 더 와닿을 것이다.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논란이나 가십보다 중요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진입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 변화할 때다. 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을 보고 싶다. 그 안에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의 다양성을 발견하고 싶다. 묵음 처리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