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8.
오늘은 배우 기주봉 닮은 아저씨가 나오지 않았다. 며칠씩 안 나오다가 갑자기 나오기도 하니 그만둔 건지는 알 수 없다. 월수금 오전 9시 초급반에서 수영을 배운 지 한 달이 지나가니 대충 같은 반 사람들의 얼굴이 익고 실력도 알게 된다. 나보다 먼저 배우기 시작한 게 분명한데 나보다 실력이 늘지 않는 사람과 나보다 늦게 등록했는데 나보다 빠르게 실력이 느는 사람을 구분하게 된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기초 단계지만 그 안에도 나름 실력차가 있고 떡잎의 색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첫날 강사에게 ‘아예 물에도 뜨지 못한다’고 말하고 키판 잡고 발차기부터 시작했는데, 그 첫날에 키판 없이 배영으로 떠서 발차기로 왕복하는 것까지 성공했다. 나는 물에 뜰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살면서 나에게 물에 뜨는 법을 가르쳐 주려 노력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내 공포를 무시했어야 했다. 등을 받쳐주려 하지 말고 그냥 머리를 물속에 거꾸로 처넣고 발을 구르도록 했어야만 했다. 강사는 내게 그렇게 했고,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하니 거짓말처럼 몸이 물에 떴다. 수영장에 두세 번 다녀왔을 때 아내에게 수영장은 몸에 더 잘 뜨는 물(이를테면 농도가 다르다던가...)을 사용하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할 정도로 그동안 물에 뜨지 못했던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에 친숙해지고 키판 없이 자유영으로 레일 끝까지 헤엄칠 수 있게 되자, ‘나는 전생에 물개였을까?’ 하고 자만심이 생겼는데, 그때쯤 강사는 새로운 과제를 내줘 쓸데없는 생각의 싹을 잘랐다. 평영 발차기를 배우면서 나는 초보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우친다. 뒷사람이 바짝 쫓아와서 마음은 쪼이는데 몸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른다. 몇 번 발차기를 해도 몸은 제자리. 결국 걸어서 앞으로 몇 걸음 간 후에 다시 엎드려 보지만 금세 가라앉고 만다. 거기에 새로 배운 평영 팔 돌리기까지 동시에 할 때면 그물에 걸린 다족류의 생물이나 구속복을 입은 폐소공포증 환자처럼 온몸을 비틀고 있다. 내가 그러고 있음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가 어렵다. 세상에는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 투성이다.
젊은 남자 두 명이 새로 등록했다. 그들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둘 다 몸이 다부지다. 몇 번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금세 물에 뜨더니 한 달 이상 앞선 나를 바짝 쫓는다. 오기가 생겨 필사적으로 헤엄친다. 25미터 레일을 자유형과 배영으로 두세 번 왕복하고 나면 숨이 턱에 닿기 시작하는데, 저 젊은 친구들은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체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뒤로 순서를 바꿔도 되련만 아직 그러고 싶지 않다. 그 친구들의 배영은 아직 서투르다. 먼저 시작한 선배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배영에 속도를 붙인다. 몸이 쭉쭉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역시 초급반에서 배영만큼은 나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중간쯤 갔을 때 강사가 나의 자세를 지적한다. “회원님은 복부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다리가 가라앉아요. 다리는 물속에서 차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차주세요. 자, 한 바퀴 더!”
오전 9시는 아무래도 중년의 여성 회원이 많은 편이다. 우리 반에도 나와 젊은 남자 두 명, 할아버지 한두 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이다. 특히 상급반은 대부분이 여성인데 나이대도 훨씬 높다. 환갑을 넘은 게 확실한 아주머니 혹은 할머니들이 쉬지 않고 레일을 오간다. 상급반의 연습 강도는 우리 초급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초급반은 세워놓고 설명하거나 강사가 직접 자세를 교정해 주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상급반은 거의 쉴 새 없이 굴린다. 강사의 목소리도 더 고압적이고 격하다. 상급반 사람들은 강사의 고함에 맞춰, 바닷속에서 떼를 지어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질서 정연하면서도 빠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레일을 왕복한다. 흘긋 보면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당사자들은 상당히 힘든 것 같지만 수영 자세가 잘 잡혀 있기 때문에 밖에서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건강하게 늙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면 오전 9시에 수영장에 가면 된다.
수영은 나에게 상당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뭔가를 배우고 있고,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주일 전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자신을 느낀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호흡이 더 편해진다. 팔 돌리기 네 번에 한 번 숨을 쉬는 것도 해보니 별로 어렵지 않다. 자신감이 붙는다. 평영 발차기도 조금씩 나아진다. 자꾸 몸이 깊이 들어가서 숨 쉬는 타이밍을 잡기 어려워서 그렇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 계속하다 보면 평영도 어느 순간 자연스레 될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꾸준히 학습해서 몸에 익히는 일. 이 간단하고 단순한 일을 잊고 살았다. 성취하고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서도 자연스레 멀어져 왔다. 잠들기 전에 자세를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수영할 때도 있다. 재미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몸과 마음에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수영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물속에서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생각한다. 호흡을 잘못하면 꼴깍 물을 먹게 된다. 수영장에 들어오기 전에 비누칠을 하지 않고 대충 샤워하는 아저씨들이 있다. 수영장 물에는 머리카락, 피부 조각 등 인간의 몸에서 나온 온갖 찌꺼기들이 부유한다. 그걸 몇 모금 마신 날이면 괜히 배가 아픈 기분이다. 굉장히 불쾌하다. 물을 먹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고민이 너무 많아서 우울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수영을 추천한다. 수영하면 멈춰있을 겨를이 없다. 팔과 다리를 배운 대로 적절하게 움직여야 한다. 제때 호흡하기 위해 박자를 타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더러운 물을 잔뜩 먹는다. 뒤에서는 다른 사람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온다. 맨 뒤에서 출발해도 어느새 1번 주자가 내 뒤를 쫓고 있다. 무슨 수를 쓰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물속에서는 오로지 그 일만 생각하게 된다. 언제 고개를 들어야 할지, 언제 무릎을 구부려야 할지. 그러면 알게 된다. 물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물에 뜨려 한다는 사실을. 이 모양 이 꼴로 볼품없게 허우적거릴지라도. 어쨌든 살아있다는 사실을. 노력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머리를 몸에게 맡겨야 할 때가 있다. 때로는 그냥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몸이 건장한 청년 하나가 들어온 지 몇 주 만에 중급반으로 올라갔다. 초급반에서는 내가 나름 앞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떡잎부터 달랐던 걸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보면 나에게도 경쟁심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오늘 수업이 끝난 후에 강사는 다음 주부터 중급반으로 올라갈 네 명을 선정했다. 몸이 다부지고 체력이 좋은 20대 남자 두 명이 제일 먼저 호명됐다. 나보다 먼저 시작한 게 확실한 중년 여자 한 명도 호명됐다. 강사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본 후에 나를 잠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회원님도 가실게요.’ 했다. 기분이 좋았지만, 찰나였다. 왜 망설인 거지? 뭐가 문제일까? 자세? 체력? 오늘은 한참 잠 못 이루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