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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5. 2018

아름다운 예술과 역사의 도시 빈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버스 맨 뒤에서 앞자리에 앉아 빈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체코의 풍경이 지나간다. 도시 외곽에는 현대적인 건물이 가끔 보였지만 아직 사회주의 체감이 많이 묻어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사람들의 생활은 노골적으로 자본주의화 되었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사회 제도를 바꾸더라도 사람을 바꾸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 사람들이 다시 사회의 불평등을 느끼고 현실을 개선하며 더 낳은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은 언제일까?


쉔브른 궁전

호화로운 쉔브른 궁전  


이런 고민을 안고 테레지아 여왕시대에 완성된 쉔브른 궁전으로 향했다. 쉔부른은 아름다운 샘이란 뜻으로 함부르크 왕조가 베르사유 궁을 능가하는 호사로운 궁을 지을 계획을 시작된 궁전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마리 앙뜨와네뜨'가 15세까지 지내던 곳이다. 


오스트리아는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독점한 유럽의 패권국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왕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까지 겸하고 있었다. 궁전에는 남편 대신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전 유럽을 지해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초상이 보인다. 벨벳 드레스를 입고 한 것 우아하게 초상화에 그려져 있다. 


시민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 호화로움과 사치는 극치를 달렸다. 곳곳에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농민을 착취하였겠는가. 얼빠진 위정자들은 옷과 왕관이 자신의 기풍과 권위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지금, 차와 명품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사회처럼.


영세중립국 오스트리아


1867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사라예보에서의 황태자 피살사건을 계기로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터키와 함께 패망한 제국은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는 1918년 7분의 1의 작은 공화국으로 축소됐다. 오스트리아는 1938년 히틀러에 의해 독일에 합병된다. 다시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한 성원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패전국의 일원으로 1945년 미, 소, 프, 영에 분할 점령되었다.


사회주의자 칼 레네


1955년 10년 만에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의 형태로 통일을 이룬다. 그 공은 분할점령 3개월 전에 임시 정부를 구성한 사회주의자 칼 레너에 있다. 임시정부에는 이념을 떠나 모든 세력이 동참했다. 카를 레너의 임시정부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하나로 묶어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결된 힘이 오스트리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강조함으로써 독립 후에 서방진영 동맹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소련을 안심시켰다. 오스트리아는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에 신경을 쓰고 있던 서방진영도 안심시켰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획득했다. 


2차 대전의 결과로 분단된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한국이다. 침략을 한 독일, 오스트리아는 통일이 되었지만, 침략을 당한 한국만 아직까지 분단되어 있다.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름답고 슬픈 성 슈테판 성당



씁쓸한 마음을 안고 성 슈테판 성당으로 향했다. 이스라엘에서 돌에 맞아 죽은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성 슈테판 성인을 기리는 성당이다. 대성당 주위를 돌며 모자이크로 된 화려한 성당의 지붕을 보았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근처의 예배당에서 교인들이 차분히 미사를 보고 있다. 아직 성당으로 사용하나 보다. 


성당 북쪽 탑 쪽으로 들어서니 ‘치통의 그리스도 상’이 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만지며, 두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듯 입을 벌리고 있다. 산자의 아픔의 치통인지, 악인을 벌주기 위한 치통인지 심연의 고통의 끝은 알 수가 없다. 앙상히 마른 몸에 오른쪽 상처까지 벌어져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짐은 무겁기만 해 보인다. 이제 그 짐을 내려놓고 좀 편안해지길 빈다.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테니까 말이다.



성당 남쪽 탑에는 터키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긴 기념으로 새겨진 3명의 조각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성당이 파괴되지 않고 침략으로 부터 지켜낸 것은 마리아가 빈을 사랑해서라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슈테판 성당은 터키 오스만 제국과 나폴레옹의 침략은 막아 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대 화재로 소실되어 절반이상이 무너졌다.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지 누구에게 빌어서 오지 않는다. 이 성당에서도 볼 수 있는 인류의 교훈이자 현 시대의 반영이다.


중세 고딕 양식의 절정인 이 성당은 아름다우면서 슬프다. 우연히 주교단에서 노래를 하는 남자 성가대를 마주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성당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착각이 들었다. 수세기 동안의 역사는 그들의 종교적 신앙으로 남아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유물이 말이다.


오늘 빈과도 안녕이다. 여행도 이제 종착점에 다다랐다. 짧고도 긴 여행이다. 시간은 짧았지만  사회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고찰을 던져 주는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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