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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5. 2018

악마적 천재, 화가 카라바조

“저런 미친놈”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말한다. 속칭 ‘꼰대’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친 세상에는 가끔 광인이 필요하다. 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더러운 세상. 틀에 박혀 정해진 기준 밖에 없는 사회. 세상은 그렇게 꽉 짜여있다. 세상을 바꿀 결심을 먹든지, 순응해서 살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미치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다들 약간 미쳐있는지도 모른다.


유럽의 중세시대는 어땠을까. 신이 지배하는 사회는 죄 없는 젊은 여자를 마녀로 몰아 불태워 죽였다. 절대자인 왕과 귀족이 신성을 통해 지배하는 경직된 중세 사회의 이단아. 성스러운 종교화와 아름다운 신화작품에 창녀와 부랑자, 집시를 집어넣은 파격의 주인공. 악마적 천재라고 불리던 카라바조를 소개한다.


그는 관습을 경멸했고 전통을 무시했다. 그는 부랑자, 집시, 창녀들을 모델삼아 성화를 그리는 파격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렇게 역설했다. "집시와 거지들 그리고 창녀들 오로지 그들만이 나의 스승이며 내 영감의 원천이다" 사회의 가장 비참한 단면, 흔히 더럽다고 여기는 그 속에서 카라바조는 그 추악한 본질을 찾아낸 셈이다.


그는 서른아홉에 요절했다. 카라바조는 불같은 성격, 폭력적이고 자유분방한 생활로 문제를 일으켰다. 생애동안 15번 수사를 받았고 7번 넘게 투옥됐다. 카라바조는 1606년 테니스장에서 판돈문제로 결투를 신청해 상대방을 칼로 찔러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도주한다. 나중에 그가 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로마에 온지 8년 만인 21살에 1600년 로마 추기경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는 ‘악마적 천재’ 카라바조. 과연 그가 악마였을까. 아니면 그를 악마로 만들어야했던 이들이 악마였을까.


토마스의 의심


<토마스의 의심> 1602~1603년, 캔버스에 유채, 107 X 146 cm, 도이칠란트 포츠담 신궁전


카라바조가 1601~1602년에 제작한 대표작 <토마스의 의심>이다.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토마스와 자연스럽게 머리를 구부리는 예수가 보인다. ‘신도 아픔을 느낀다’는 사실적 묘사가 얼마나 파격적인 발상인가.


예수의 부활을 못 봤던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검지 한마디가 들어간 걸 보니 상처 깊이와 길이가 장난 아니다. 결국 예수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며 부활을 증명해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 성화는 많은 화가들에게 그려졌다. 이들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하지 바빴지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그리지 못했다. 성서 내용을 미화시킨 성화에 익숙한 보수적인 화가들과 주문한 교회는 카라바조 작품을 저주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가장 사실적으로 당시 현실을 묘사하면서 신 중심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술 때문에 병든 바쿠스


<병든 바쿠스> 1593년, 캔버스에 유채, 67 x 53 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그림을 그리는 기교가 뛰어났던 카라바조는 그림들을 스스로 익히면서 빛과 색채를 이해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술 마시는 바쿠스> <병든 바쿠스>가 있다. 술의 신인 바쿠스가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술주정을 한다는 발상이 이 그림에 들어있다. 술에 절어서 지내는 바쿠스는 인간처럼 병에 걸리고, 손톱 밑에 때가 꼈을 것이라는 카라바조의 상상이다.


<술마시는 바쿠스> 1594~1596년, 캔버스에 유채, 85 x 98 cm,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당시 기득권 미술가 들은 카라바조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카라바조는 캔버스에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형식을 파괴했고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그의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기 때문에 신 중심의 관념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논쟁의 중심에 선 카라바조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1606, 캔버스에 유채, 369 x 245 cm, 루브르 박물관


카라바조의 작품은 늘 논쟁을 가져왔다. 종교적인 후원자에게는 불경스러워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작품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1601~1606)은 의뢰를 한 교회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림 속 성모마리아 모델이 물에 빠져 죽은 창녀였기 때문이다. 헝클어진 머리와 물에 퉁퉁 부은 몸으로 묘사한 성모마리아 그림은 엄청난 논쟁을 일으켰다. 마리아의 불룩한 배, 그리고 다리를 노출시키며 마리아는 인간 그 자체로 그려졌다.


보르게세 추기경이 교황에 오르자 카라바조는 로마의 모든 화가 중 처음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새 교황은 카라바조에게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림에 신성함이 없어. 자네에게는 신성한 영혼이 깃들어 있지 않아. 자네에게도 신성한 기운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예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이처럼 카라바조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기만 최고의 논쟁에 중심에 선 화가였다.


카라바조의 마지막 그림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년~1610년, 캔버스에 유채, 125 x 101 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인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목을 들고 있는 슬픈 얼굴의 다윗이 카라바조의 젊은 시절 모습을 그린 것이며, 추한 표정을 한 골리앗의 머리는 늙은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해석한다.


어떤 사학자는 다윗이 들고 있는 칼의 의미로 이 작품을 해석한다. 칼에 새겨져 있는 라틴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성경 <시편>에 단 주석의 일부라고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예수가 사탄을 물리쳤듯 겸손함으로 교만함을 무찔러야한다“


한 생을 반항아로 살아온 카라바죠는 마지막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중세시대를 살아왔다. 그의 삶은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 도전이라기보다 반항에 가까웠다. 다윗은 불가능해 보이는 골리앗을 돌팔매로 무찔렀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은 이처럼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인간 그 자체를 그려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작품인 듯하다.


세속적이며 사실적인 그림으로 빛의 마술사라 불리며 바로크 미술에 한 획을 그은 카라바죠. 그를 악마로 만들었던 것은 인간보다 신을 중시했던 당시 사회 풍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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