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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l 05. 2018

민족혼을 깨우기 위한 외침, 이상화

시인 이상화(1901-1943)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나는 온몸에 했살을 받고


시비 - 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


암울했던 그 때 그 시절


1938년 가을 어느 널 저녁, 빙허 현진건(운수좋은날, 술 권하는 사회로 유명한 소설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 시인 이상화의 집으로 놀러왔다. 빙허의 술 실력을 잘 아는 상화는 술상을 한상 차렸다.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켰다.


상화가 말을 꺼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독립은 어떻게 되는 걸까? 요즘 괜히 우울하고 암울한 생각이 들어, 일본이 조선인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고 일부 가난하고 몰지각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원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걸 보고만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반대하고 나서자니 힘이 달리고.." 


"상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자네 생각과 같을 걸세. 나도 마찬가지야. 경술년에 국치를 당했으니 벌써 이십팔 년이야. 일본은 점점 더 강해지는 거 같고 독립의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왜 우울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래도 태어나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도 있지. 경술국치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우리와 같은 민족혼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그냥 놔두면 당연히 없지. 그러니까 교육이 필요한 거지. 우리가 죽기 전에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자식들에게 우리 민족정신을 전수해야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거 아닐까?" "민족혼만 살아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꺼야" 


상화와 빙허는 술잔을 높이 들고 힘차게 건배했다. 상화가 "빼앗긴 들에도"라고 선창하자 빙허가 "반드시 봄이 온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 때문인지 두 사람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출처 소설가 오철환)


시인은 죽어서 말 한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인 이상화가 처음 찾은 도피처는 허무한 환상이었다. 그는 시 <나의 침실로>에서 오지 않는 애인 '마돈나'를 기다리는 마음을 관능적으로 표현하며 식민지 현실을 부정했다.


이런 이상화에게 현실을 직면시켜준 계기는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그는 프랑스 유학을 위해 도일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광란의 살육장을 목격했다. 몸으로 체득된 제국주의의 본성은 그를 귀국 길로 이끌었다. 이윽고 이상화는 귀국 후 일제치하의 참혹한 현실인식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개벽>을 발표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민족혼을 깨우기 위한 이상화의 외침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 생존을 위해 굴종으로 살아가던 지식인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그는 "시인이란 사상의 비판자이며 생활의 선구자이기에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방향을 제시하여야한다"고 믿었다.


이상화는 일제말기 대부분 문인들이 변절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갖고 일제에 저항했다. 그는 "어려운 삶속에서 호흡을 같이하고자 현실 속에 시를 찾는 것이 시인의 할일"이라는 투철한 문학관으로 비통한 조국의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당시 시대상은 이렇듯 캄캄했다. 도무지 광복을 올 것 같지 않았고 일제는 강대해보였다. 당하고 또 당하니 얼마나 억울했겠나. 허나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일제의 침략전쟁은 마지막 발악이자 패망의 서곡이었다. 그렇게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시인 이상화는 그토록 그리던 '봄'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2년 앞둔 43세의 나이로 운명을 마감했다. 가장 어두운 시절, 그는 그렇게 봄을 꿈꾸었다. 그리고 말했다. "시인은 죽어서 말 한다"


봄은 온다


희망이 없으면 깜깜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빛을 찾아보기 힘들다. 희망이라는 작은 빛을 찾아 고개를 돌리려 해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유독 추운 겨울이다. 추운 겨울을 견디다 못해 너도나도 움츠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검열하고, 누가 볼세라 비판대열에 나선다. 이 겨울은 언제까지 추울까. 


파괴된 민주주의는 정체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거센 파도와 같은 물결이 이제 다가온다. 그 물결이 대지를 휩쓸 때 새로운 새싹은 봄을 맞아 활짝 피어날 것이다. 먼저 봄을 기다려 보았던 시인 이상화는 알고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은 봄이 가까워졌다는 의미라는 것을. 빼앗긴 들에 봄이 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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