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삽질 Jul 05. 2018

영롱한 불빛 아래 빛나는 창경궁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살아있는 상왕인 태종 이방원을 편안히 모시기 위해 '수강궁'이란 이름으로 지었던 궁궐이다. 그 후 성종 때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생활공간으로 증건 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서울에 살면서 궁을 가본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문화재청에서 경복궁과 창경궁을 야간개장 하고 있다. 낮에 궁의 자태에 반한 사람들은 영롱한 불빛 아래 빛나는 궁을 보기 위해 예매를 서두른다. 하지만 보통 몇 분이면 끝나기에 미친 듯이 클릭을 해야 한다. 드디어 어렵게 창경궁을 B와 C와 함께 둘러보았다. 



“와 진짜 멋있다. 궁이라 따분할 줄 알았는데 정말 좋으네요. 문정전(文政殿) 안의 단청과 해와 달이 그려진 그림이 제일 좋아요.” 전부터 가고 싶다고 조르던 B는 한껏 들떠있다. 


“영화 ‘사도’ 봤어요? 그 문정전(文政殿) 앞뜰에 사도세자의 뒤주가 있었죠. 그런 역사적 공간이에요. 단청이 좋다면 질문 하나할까요? 단청은 우리나라에만 있을까요?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요?” 


“음.. 있을 거 같은데요.” 


“그래요. 중국, 일본, 인도 모두 단청을 해요. 그러나 한국 단청에 비해 수준이 낮아요. 중국에 공자가 출생한 대성전이라는 건물이 있어요. 그 단청은 표면에 두껍게 흙을 바르고 채색한 정도에요. 색조도 부실하고 어둡죠. 일본의 단청은 적색, 검정색, 황금색이 주를 이루고 있어 화려하지는 않아요. 반면에 우리나라 단청은 화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우아합니다.” 


“우리나라 단청은 흔히 목조건물에 채색을 하는 걸로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오행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궁궐의 단청은 그 권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바람이나 습기 같은 기후변화로부터 건축물을 지켜주죠. 동시에 외부를 화려하게 꾸미면서 건축재질의 단점을 보완하기도 해요.” 



“지붕 아래 화려한 단청과 지붕 위의 단조로운 어처구니라고 하는 돌 인형(?)이 잘 어울리죠. 어처구니는 토수 뒤로 5개의 잡상, 용두, 취두 순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정말 환상의 조합이라니깐요. 


기와지붕은 정말 아름다워요.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곡선과 약간 치켜 올라간 추녀마루의 선은 한국적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선과 선이 이어지는 밤하늘 풍경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질문은 일월오봉도로 이어졌다. B는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저 해와 달 그림은 많이 본 그림인데 왜 저런 그림을 왕 용상 뒤에 걸어두었을까요?” 



“저건 일월오봉도라고 왕 뒤에만 걸어놓을 수 있는 그림이죠. 서양의 왕들은 보통 자신의 의자 뒤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죠. 일월오봉도에는 음양오행이 모두 담겨 있는데 이는 우주의 조화를 뜻합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가치,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세계의 복잡한 내용들을 간결하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조선은 서양처럼 왕 개인 보다, 통치이념을 더 중시했다는 이야기죠.” 


문정전을 지나 조금 걷다보면 넓은 정원 한 가운데 즈음 함인정(涵仁亭)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함인정은 "세상이 임금의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이곳은 임금이 문무과거에 급제한 신하를 접견했던 장소다. 함인정 누각 안쪽으로 네 곳에 현판이 걸려있는데, 동서남북 각 방향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한 글귀가 걸려있다. 도연명 사시에 나온 시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 눈 녹은 봄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 여름의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마다 걸려있네)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 가을 달은 천지를 밝게 비추니)
동령수고성(冬嶺秀孤松 : 겨울 산봉우리 외롭게 선 소나무는 빼어나구나) 


계절별로 의미가 다른 자연의 의미를 담고 있다. 창경궁의 건축물 배치와 구조는 계절마다 자연이 선물하는 경치를 바로 눈앞에서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창경궁의 조형미는 정말 탁월하다. 


C는 아까부터 창경궁 뒤편 춘당지를 가자고 난리다. 야간개장이라 호숫가 불빛이 멋있을지 몰라 발걸음을 옮겨봤다. 


“와 진짜 멋있다. 저기 큰 호수 좀 봐요. 가운데 섬도 있네요. 왠지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신비한 느낌이에요. 그런데 궁 안에 이렇게 큰 연못이 있네요. 하긴 요즘 높으신 부자들도 집에 수영장 놓는데요. 뭘” 


사실 춘당지는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던 곳이다.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던 본래의 춘당지다.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짓던 11개 논이었다. 임금은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풍년을 기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왕이 지금 대통령 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일본놈들이 우리 문화재를 파괴하고, 조선 왕조를 깎아내리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키고 연못파고, 동물원, 식물원 지어 공원으로 만들어버렸어요. 나쁜 놈들. 그래서 1980년대 복원을 하면서 일제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해 벚꽃나무도 모두 뽑아버렸죠.” 


춘당지와 가까운 곳에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월근문(月覲門)이 있다. 월근문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당에 참배하러 가기 위해 별로로 만든 문이다. <승정원일기> 정조 3년 10월 10일자에는 “이 문을 거쳐서 혹 한 달에 한 번 전배하거나 한 달씩 걸러 전배하여 어린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내 슬픔을 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정조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져온다. 


춘당지를 다 돌아보자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연못에 비친 춘당지는 자못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낮에는 볼 수 없는 야간개장만의 매력이 이런 게 아닐까. 청아한 달빛이 서쪽 하늘에 고즈넉하게 걸려있는 풍경,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삐~! 삐~! 아 이제 창경궁 야간개장시간 끝났습니다. 지금 안 나가면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해요. 빨리나가세요. 꼭 풀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못나가는 사람들 있어요. 여기 창경궁 뒤편에 시체를 담는 관이 있어요. 여기 조선시대 여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암투가 있었는지 아세요? 여기 귀신이 얼마나 많은데요!” 


문화재청 옷을 입은 공무원이 야간개장 시간이 끝났다며 관람객들을 서둘러 내보낸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창경궁을 나왔다. 창경궁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참 잘 보여준다. 이렇듯 우리민족의 고유한 미(美)를 알았을 때, 비로소 미적가치의 기준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이공의 흰옷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