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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n 21. 2018

지리산, 역사의 흔적

한국인의 기상이 이곳에서 발원되다

2월 1일 토요일 


첫 산행일기다. 내일이 산행이라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전부터 소망해왔던 겨울 지리산 종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산의 무게에 눌려 지금은 아직 벅차다. 준비의 부족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최대한 준비하려 한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것인데 사람들과의 만남이 해결해주겠지. 이번 산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냥 산을 느끼고 오는 것? 나의 신념을 굳히는 것? 후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목표는 산을 느끼고 사람을 느끼자. 추상적이지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처절했던 무장투쟁 역사를 느낄 수는 있을까? 빨치산들의 처절한 전투, 무엇을 가슴에 담아올 지에 대한 기대와 산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한다. 산 앞에서 겸손하자. 


2월 2일 일요일 


9시 20분. 출발부터 늦어지고 있다. 예상한데로 후배 녀석은 늦게 오고 가방은 무겁다. 여기에 얼마나 더 넣어야할지 두려울 뿐이다. 잘돼야 할 텐데. 택시를 타고 운 좋게 11시 45분 화엄사 가는 직행버스를 바로 탈 수 있어 일정이 그렇게 늦어지지는 많았다.


화엄사 버스터미널에서 올라가다가 사진도 찍고 한참 가다보니 매표소가 나왔다. 아저씨가 우리 짐을 보고 "위에 눈바람이 불어 종주는 힘들 것 같네." 하신다. 이런.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한데 무슨 소리야. 꼭 종주 하겠다고 다시 한 번 결심하고 다시 산행에 나섰다. 


드디어 산행을 시작했다. 화엄사에서 스피치, 아이젠으로 중무장을 하고 얼마 전에 산 산악용 바지와 장갑까지 끼고 올라갔다. 가방이 너무 무겁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마치 산악부 1학년 때의 텐트 매고 선배들의 채찍질에 올라가던 그 느낌이다.


오늘따라 왜 이리 숨이 가쁜지 모르겠다. 가는 길에 가장 맛있는 식량인 눈을 먹으며 올라갔다. 쌓여있는 눈을 먹는다는 것,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손으로 한 웅큼 쥐어 안쪽의 깨끗한 부분을 먹으면 그 맛이 아이스크림 같다. 레몬 맛 사탕과 눈을 같이 먹었더니 영락없는 레몬 샤베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눈을 먹다 못해 흘러내리는 계곡 물도 먹으며 몇 ㎞ 남았다는 이정표만을 바라보며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후배 녀석은 뒤에서 "형 아주 죽을라하네. 벌써 그러면 어떡해" 라고 계속 재촉한다. 벌써 이렇게 힘든데 종주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풍경이 정말 멋있다. 아래로 펼쳐진 구름과 봉우리들. 그래서 올라오나 보다. 신나게 평지를 걷다보니 노고단 산장이 보인다. 부산에서 오신 아주머니, 아저씨 덕에 삼겹살과 된장국도 얻어먹고 우리의 주 메뉴인 3분 카레에 깻잎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그분들과 이야기하며 같이 식사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만의 특권이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 내가 아는 별자리는 다 찾았다.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아, 북두칠성, 별이 너무 많아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밥 먹기 전에 본 노고단 일몰도 일품이다. 내일 9시간 산행이 걱정이지만 산은 언제나 한품에 우리를 안아준다.


2월 3일 월요일 


밤새 잠을 설쳤다. 출입금지 구역인 노고단으로 향하여 노고운해를 본 순간 애써 올라와서 다시 내려가야 된다는 짜증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산들 사이의 구름의 바다,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발 같기도 하고, 오로라로 만든 커튼 같기도 한 구름이 사방에 떠있다. 이렇게 멋있을 줄이야.



눈 위를 걷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설레는 마음에 첫발을 딛었지만 지금까지의 다져진 길은 없고 우리가 처음이었다. 눈이 허리까지 빠지는 느낌, 도저히 안 되겠어서 4발로 기어갔더니 좀 더 나았다. 4발로 기고 있는 나도 옆의 무수한 토끼와 다른 동물 발자국을 보니 동물이 된 기분이다. 삼도봉은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 지점이다. 몇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쳐 가져온 비상식량도 다 먹고 눈과 고드름으로 갈증을 달래며 토끼봉, 명선봉을 지나 4시쯤 오늘의 숙소인 연하천 산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무런 난방시설 없이 침낭과 매트리스로만 보내야한다. 추위 때문에 손발이 잘 움직이질 않고 배만 고프다. 역시 겨울 산행은 추위와의 싸움이다.


연하천 산장지기는 갈색머리를 길러 파마하고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산장지기는 백두대간 50일 종주, 산이 얼마나 좋은지 무서운지, 장비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술기운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번 종주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저녁이었다. 산은 천천히 그리고 꼭 정상을 오를 필요는 없다는 그 말이 정말 인상 깊었다. 꾸준하면 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반짝 열심히 할 수는 있지만 꾸준하긴 어렵다. 산장에 지내면서 전국의 산을 다니는 이들의 삶의 여유와 깊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산에서 배운 것인지.


2월 4일 화요일 


어제 먹은 술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 어제도 중간에 계속 꿈을 꾸었는데 꿈꾸면서도 내 그 많은 상상력에 감탄했다. 7시 좀 넘어서 일어나 씻는데 손끝이 갈라져서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은 출발이지만 여유롭고 즐기면서 갔다. 가는 중간 중간의 능선과 구름들은 가슴속에 담고 가끔 너무 멋있으면 사진도 찍으면서 갔다. 가다 만난 작은 딱따구리 소리가 들려 사진 찍으려다 놓쳐 버렸다.


그곳에서 눈에 띈 것이 ‘현대사의 아픔인 지리산 빨치산’라는 빨치산 소탕 표시판이었다. 당시 유격대 대장인 이현상 근거지가 여기서 6.3㎞라고 적혀있었다.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히 학살한 현대사의 비극. 그 당시 민중 사이에서 그들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들은 죽인 경찰들이 거의 대부분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변절한 자들인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씁쓸한 마음을 접고 발길을 돌렸다. 새석산장은 아직도 먼 건가.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이 조금씩 오기 시작하는데 걱정이 된다. 길이 사라질 수도 있고 내일 일출도 봐야하는데. 그래서 발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눈발은 점점 심해지고 고도 1700m를 넘어서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길이 약간 씩 사라져간다. 0.8㎞ 남았는데 정말 안 나온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마지막이 가장 힘들다. 드디어 넓은 평원이 나왔는데 눈 때문에 산장이 안 보인다. 좀 더 가니 장터목이 보이고 후배는 탈진 할 것 같다고 하면서 털푸덕 주저앉았다.


도착한 산장은 시설은 좋지만 바로 천왕봉 아래라 사람이 붐벼 시끄럽다. 소등이 9시라 원래 하고자했던 할 일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올라갔다. 이제 내일 5시 40분에 일어나서 일출만 보면 된다. 무지 따뜻한 숙소에서 옆에 아저씨가 코를 심하게 골았지만 꿀잠을 잤다.


2월 5일 수요일 


일출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뒤척이다 일어났다. 서둘러 나왔지만 밖은 눈보라가 치는 어제 그대로였다. 혹시 모를 기대감에 랜턴을 하나씩 들고 야간 산행을 시작했다. 눈보라를 뚫고 가던 중에 길을 잃은 4명을 만났다. 밤새 내린 눈과 바람이 길을 다 없애버려서 그 후로 몇 번 헤매다가 드디어 천왕봉을 밟았다. 하지만 날씨 때문에 일출 보지 못하고 천왕봉의 절경도 보지 못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다. 하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에 3박4일의 종주의 마지막인 천왕봉의 ‘한국인의 기상이 이곳에서 발원되다’ 비석을 얼싸 안았다.



내려가는 길은 험난했다. 눈보라는 계속 되고 아무래도 오늘 이 길은 우리가 초행인 것 같았다. 어제 사람들이 만들어 온 길의 흔적이 아주 조금씩 남아있고 눈은 무릎에서 엉덩이까지 빠졌다. 이래서 눈이 많이 오는 산에서 길을 잃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찾기는 힘들었지만 나무마다 핀 눈꽃이며 설경은 정말 눈부시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없어 우리뿐이었다. 산장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여기까지 길 트고 오느라고 수고했다"며 다른 등산객이 우리가 만들어 온 길을 따라 속속 도착하였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한 번도 안 쉬고 대원사까지 6㎞를 뛰어내려왔다. 정말 허벅지가 터질 듯이 달려 80분 만에 내려왔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종주 한 그 느낌은 오지다는 표현이 딱 이었다. 


지리산 첫 문턱부터 있는 빨치산 격퇴 안내판에서 느낀 현대사의 비극, 가려진 역사 속에서 나의 몫을 찾는데 이번 종주가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지리산, 힘들었던 만큼 거기에 서린 선배들의 한과 역사를 가슴 속에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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