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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n 21. 2018

고향가는 길

내 고향 황룡리.

아침에 눈을 떴다. 생각이 많은 요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 낚시나 갈까 하다가 할머니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나’ ‘지금은 뭘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아직 푸름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를 지나 시골 터미널에 도착했다. 간간히 들리는 라디오 소리가 귀를 거스르기는 했지만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만큼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기 좋은 곳은 없다.



군내버스에서 내려 어렸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작은 읍을 지나 타박타박 시골길을 걸었다. 우리 사는 곳은 며칠 사이 뭐가 생겼다 없어지지만 여기는 항상 그대로다. 마침 비가 온 뒤라 적당히 물안개도 끼어있고 길가 작은 꽃들에도 이슬이 머금어 있어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에는 딱 좋은 상태였다.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버스 안에서는 몰랐는데 길가를 유심히 보면서 가니 나무 주위에 작은 벌레들도 많고 새소리도 ‘뻐꾹’ ‘뻐꾹’ 울고 무슨 작은 새소리도 들린다. 가까이서 들리는 이름 모를 새 소리. 어렸을 때 포도 따먹으며 원두막에서 놀았던 포도밭도 가보고 개울가에서 미꾸라지 잡던 도랑 옆 논길도 걸어보았다. 


할머니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 집안을 보니 할아버지 혼자 계시고 할머니는 뒷밭에 계신단다. 가방을 안 풀고 뒷밭에 가 자식새끼들 먹이려 콩, 더덕, 도라지, 양파 들을 매고 계시는 할머니를 꼭 안아 드렸다. 검은 흙과 시큼한 땀 냄새가 그날따라 향긋하게 풍겨왔다. 평소에는 오지도 않던 손주가 아무 연락도 없이 오니 얼마나 반가우셨을까? 집으로 들어와서는 이것도, 저것도 먹으라 하신다.


“우리 손자는 복 있은께 먹을 거 많을 때 왔네잉” 하시면서 “10월 먹을 거 많을 때 닭이 배터지게 먹고 마당에 자빠져 자니 얼마나 복 있냐” 하신다. 내가 닭띠고 10월생이니 하시는 말씀이다. 큰 손자가 와서 오리탕 끓인다고 할아버지가 방금 뽑아온 마늘을 까면서 “비 온 다음에 마늘이 주먹만 하게 컸네”“아따 옹글지게 컸다”고 마늘을 까신다. 삶아온 콩을 까먹으며 할머니, 할아버지 일하는 소리 들으니 참 좋다. 


예전에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에 앉아 미뤄왔던 편지를 쓰려 펜을 들었다. 하지만 흙 내음은 내 마음을 데리고 유년시절로 향한다. 항상 도시에 살았던 나는 여름방학만 되면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방학 내내 아제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던 그 때, 정말 까만 얼굴이 빨개지도록 놀았다.



국민 학교 때 시골에서 아제들과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 논에서 대나무 낚시를 만들어 끝에 풀잎을 엮어 매달면 개구리 낚시가 된다. 개구리는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벌레로 알고 덥석 문다. 가끔 한밤중에 나와 황소개구리를 작살로 잡기도 했다. 시골 아제 말에 개구리한테 밤중에 손전등을 비추면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작살을 만들어 한밤에 나가서 개울물가에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황소개구리에 힘껏 던졌다. 우리는 당당히 개구리 몇 마리를 작살에 꿰어서 집으로 가져왔다. 그 개구리를 구워 먹으려 조기 굽는 망을 요리조리 살피는데 작은 할머니가 나오셨다. “비리것네. 맛소금이라도 찍어먹어야지” 하시며 소금 종지를 내오신다. 그 때 난 뒷다리를 먹었는데 맛은 닭고기 맛이었다. 고소하고 짭쪼름한 그 맛.


옛날 생각에 혼자 피식 웃고 다시 집밖으로 나왔다. 뒷문으로 나가 언덕을 내려가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정자가 나온다. 강줄기의 암벽 위의 언덕에 세워진 이곳은 주변 소나무 숲 사이의 백일홍(배롱나무) 6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1년에 백일은 꽃이 피어있다는 백일홍. 흐드러지게 아름다운 자주색 꽃망울이 흩어져 있다. 봄이면 부드러운, 여름이면 만발한 황홀경에 빠진다. 아직 그 절경이 보이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또 오고 싶은 곳이다.

가파른 깎아지는 절벽 언덕 사이로 오죽(烏竹). 검은 대나무가 자란다. 귀하디 귀하다는 그 오죽대를 얻으러 어릴 적 살금살금 절벽을 내려갔던 기억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위에 곧게 뻗어있는 소나무 숲이 향기롭다.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신선한 내음. 몸 속 세포들이 하나씩 살아나는 기분이다. 저 아래 다리에서 어릴 적 피리 낚시를 했었지. 송사리보다 조금 큰 피리가 연일 올라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계속 잡았던 기억이 난다. 


증조 할아버지의 글씨


몇 대손. 증조, 고조, 5대조, 6대조.... 십 몇 대조 할아버지의 묘가 있는 이곳. 명절 때 성묘만 가면 너무 외울 곳이 많아 머리가 아팠지만. 그래. 어린 시절 추억이 있고 정겨운 사람들이 있는 이곳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사시는 곳, 삶의 터전인 곳이 바로 조국이다. 고향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민족도 사랑할 수 있다. 내 나라 내 땅을 사랑하지 않고 무슨 의미가 있으랴. 


마음의 뿌리를 잃어버린 부모님들. 일자리 찾기에 메말라 버린 젊은 세대들. 경쟁에 시들어가고 있는 새싹들. 소중한 이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키워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터전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어렸을 적의 추억을 되새기며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고향 같은 곳이 절실해 보인다. 



조금 더 걸으면 이강의 본류인 정말 큰 강이 나온다. 큰 강에서 바람 따라 일렁이는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다의 파도와는 다른 강만의 온화함과 따뜻함이 은은하게 밀려온다. 가끔씩 튀어 올라 은빛 자태를 뽐내는 물고기들. 뉘엿뉘엿 긴 목을 빼며 한가롭게 날갯짓을 하는 왜가리. 발을 걷어 부치고 얕은 물에 들어가 어린 시절 그 때처럼 고동과 조개를 찾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붉게 물든 노을과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처럼 강은 나를 반긴다. 항상 이맘때쯤 밥 먹으러 찾으러 나오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손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 그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동생들. 솥뚜껑 같은 손을 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래. 이들을 위해 살아야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후손들이 기쁘게 살아갈 그 날을 위해. 다시 서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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