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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un 21. 2018

블라디보스토크, 저항의 혼이 깃든 그 곳

2003.07. 기록들

철없던 대학시절. 딱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참에 문화교류를 신청한다는 공문을 봤다. 우선 신청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풍물패였다는 이력 하나로 덜컥 선발됐다. 그렇게 갔다 왔던 곳.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동방을 지배하라’의 의미), 항일 투사들이 혼이 숨 쉬는 연해주 바로 그 이야기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무엇을 하고 올 것인가? 


대학 3학년, 합숙과 농활을 포기하고 가기로 한 러시아. 가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어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 내가 무엇을 소홀히 했었는지 나의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다.


사전 준비와 풍물 연습. 밥 먹고 나서 한숨 자려고 눕기 전에, 오전 연습. 아! 너무 어렵다. 오금(풍물을 칠 때 무릎을 굽히면서 리듬감을 주는 행위)을 주기위해 무릎을 써야지. 풍물 연습이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다. 잘 하지도 못하는 설장구를 해야 하나. 사물놀이는 별달거리 앞까지 연습이 끝났다.


오늘은 장구가 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물을 왜 치는가 고민이 된다. 우선 풍물이 즐겁고 좋기 때문이다. 공연하기 위한 보여주기 풍물, 내가 배운 사회운동을 위한 풍물. 어느 것이 더 큰지 아직은 잘모르겠다. 지금은 전자로 여기까지 왔는데 형편없는 실력에 과도한 욕심이 걱정이다. 다행히 오늘 아침 설장구 연습은 좀 맘에 들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보니 미아가 되어있었다. 피곤한 몸으로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1시. 아무도 없었다. 그 황당함이란.  


출발 그리고 황당한 사건 


버스 안이다. 드디어 출발인데 비가 온다. 나름대로 설렌다. 사람, 사람이 중요하다. 선배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가서 뭘 보는 것 보다, 사람과 부대끼며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그래도 대충 윤곽은 보인다. 사람을 통해서 가슴으로 느끼고 사람을 남기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


지금 시국이 궁금하다. 휴게소나 공항을 가면 신문부터 사야겠다. 버스 안은 참 좋은 곳이다. 나에게 사색의 시간을 준다. 논밭의 벼 포기 하나하나, 집들 하나하나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비행기를 탔다. 기내가 마구 떨려서 불안하다. 기내식으로 불고기가 나왔다. 검정콩은 먹자마자 뱉어버렸다. 젤리 비슷한 것도 도저히 못 먹겠다. 음식이 걱정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한숨 돌렸다. 비행기가 안 좋아서 조마조마 했다. 러시아 땅을 밟을 때는 어떤 느낌일까? 연해주. 독립투사들의 혼이 느껴질까? 아무튼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전에 온 교수님과 러시아 학생들이 마중 나왔다. ‘나타샤’ 라는 친구는 한국말을 꽤 잘했다. ‘꼴랴(니콜라이의 약칭)’라는 친구는 영어로 대화했는데 가끔씩 막혔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은 됐다. 다른 두 여자들은 한국말을 별로 못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 


작은 버스를 꾸역꾸역 한 시간 타고 극동대학 경제대학 기숙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기숙사는 아주 좋았다. 냉장고, TV, 오븐 다 있었다. 거의 러시아에서 호텔 급이란다. 짐 정리를 하던 중 지갑을 읽어버린 것을 발견했다. 다행이 여권과 비자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한 푼도 없었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를 어쩌나. 


러시아의 첫 인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외출이다. 시장에 갔는데 러시아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뭐라 그럴까. 경계심. 아무튼 별로 느낌이 좋지는 못했다. 오늘 술을 먹고 이야기 해볼까? 비만 안 왔으면 좋겠는데 날마다 비다. 


시장에 가는 길에 처음으로 햇볕을 봤다. 시장은 걸어서 한 20분 거리인데 어제 필름이 끊길 정도 먹은 보드카와 맥주 기운이 남아 날 힘들게 했다. 내 목표를 지켜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차가 2시간 빠르니 시간이 엄청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다. 내일 부터는 빨리 일어나야겠다.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크다. 여자들은 거의 슈퍼모델 수준의 몸매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젊은 여자들은 전부 딱 붙는 옷만 입는다. 키도 큰데 다 힐을 신고 있다. 아직 2일 째라 민족색 같은 것은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고 싶어도 무슨 말이 통해야지. 


걱정할 것 같아 전화카드를 샀으니 전화라도 한 통화씩 해야겠다. 그나마 같이 있는 ‘콜랴’와는 영어로 말해야해 무슨 어학연수 온 느낌이다. 한국 가서 영어공부 좀 해야겠다. 이제 화요일부터 공연히 들어가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겠다. 내일은 ‘콜랴’에게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꼭 가고 싶다. 친한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 


러시아 음식은 도저히 못 먹겠다. 학교 구내식당과 패스트푸드점에 갔는데 거의 대부분 고기와 햄들이다. 밥도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똑같이 느끼한 볶음밥이다. 정말 널리고 널린 게 닭고기이다. 식사 후 ‘콜랴’에게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 OK. 기쁘다.


극동 대학교 총장을 잠깐 만나고 앞으로 우리가 한글과 풍물을 가르쳐야 될 러시아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여기를 1학년이 만으로 17이라서 우리보다 1살이 빠르다. 1학년들은 영어, 한국어 다 못해서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했다. 그 중에서 ‘욜가’라는 학생이 있는데 다른 애들보다 더 동양적으로 생겼다. 


그 후에 버스타고 시내로 갔다. 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독립군을 이끈 장수의 동상과 잠수함, 군함, 시베리아 횡단 철도 종착역, 나름대로 볼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일 독립투사들이 세워 놓은 비다. '자주와 독립' 우리의 선조들이 이 먼 이국땅까지 와서 피로 얻어낸 가치있는 문구들이 보인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러시아 할머니가 러시아어로 설명을 해주면 ‘콜랴’가 나에게 영어로 말해주었다. 나는 옆의 친구들에게 다시 번역해 말해주느라고 진땀을 뺐다. 누군가 ‘콜랴’와 나를 형제라고 하자 우리는 웃었다. 


영사관을 가려다 허탕치고 한국 교육원이라는 곳에 도착해 정부, 교육청 산하 사람을 만났다. 정부 직원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의거를 치르기 전에 손가락을 잘라 독립을 맹세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 설명을 하면서 뜬금없이 빨치산을 맹렬히 비난 했다. 과연 그가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할까. 태백산맥은 봤을까? 그들의 사상을 논하기 전에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 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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