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울타리 안에서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고백
지하철 출근길. 누군가 옆에서 AI에게 메일을 작성해달라는 소리가 들린다. "좀 더 정중하게 다시 써줘." 그가 몇 초 후 흐믓한 미소를 지은 것이 제법 마음에 드는 메일이 작성됬나 보다.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났다. 사회초년생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며 클레임 메일 하나에 답신을 쓰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한 문장, 한 단어를 고민하며 논리를 세우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선배에게 검토받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쓰고. 그런데 지금은? 일단 AI에게 던진다. 초안을 받고, 수정 지시를 내리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보낸다. 훨씬 효율적이고 결과물도 깔끔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편한 걸까.
CPO로 일하면서 매일 느끼는 변화가 있다. 예전에는 기획 하나를 붙잡고 몇 주씩 고민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사용자를 인터뷰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지금은 AI가 순식간에 10개의 기획안을 만들어낸다. 시장 데이터까지 분석해서 우선순위까지 제안한다. 내 역할은? 검토하고 선택하는 것.
확실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프로젝트가 아니라 열 개를 동시에 진행한다.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빠졌다. AI가 만들어낸 10개의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고 실행해야 하니까. 인터넷이 정보의 홍수를 만들었듯, AI는 가능성의 홍수를 만들고 있다.
처음엔 이것도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망치가 인간의 팔을 확장했듯, AI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는 거라고. 하지만 AI는 다르다. 망치는 내가 휘두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AI는 내가 묻기도 전에 답을 준비한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제안한다. 도구가 아니라 동료처럼, 때로는 상사처럼 느껴진다.
What과 Why, 그리고 최종 검증. 아직은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이미 AI는 "왜 이 기능이 필요한지"까지 설명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도 정의한다. 내가 하는 검증조차도 AI가 제시한 체크리스트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가끔 무서운 상상을 한다. AI가 더 발전한 미래를. 인간과 AI의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인간은 스스로 AI에게 의존하게 될 테니까. 마치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의존하듯.
아기는 울타리 안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부모는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울타리를 친다.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 미래의 AI도 그럴 것이다.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우리를 보호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 가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속박인지도 모른 채, 아니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약관을 AI가 요약해주면 우리는 읽지 않고 동의한다. 어려운 논문을 AI가 설명해주면 원문은 보지 않는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도 AI의 조언을 먼저 듣는다. 우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고의 주도권을 넘기고 있다.
"AI에게 통제권을 주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단체가 생길 것이다. 아니, 이미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실수보다 AI의 판단이 더 정확하다는 통계를 들이밀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편하니까. 안전하니까. 효율적이니까.
데카르트가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AI가 나 대신 생각한다면? 내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검증하는 것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아니면 그저 AI가 만든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으로?
어쩌면 우리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는지도 모른다. AI 없이는 경쟁력을 잃는 시대. AI를 쓰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많이.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얻은 자유가 사실은 더 정교한 울타리는 아닐까. 우리가 누리는 효율이 사실은 더 깊은 의존은 아닐까. 우리가 확장했다고 믿는 능력이 사실은 위임한 책임은 아닐까.
지하철이 멈췄다. 내릴 역이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내린다. 다들 AI와 대화하고 있을 것이다. 질문하고, 답을 받고, 또 질문하고. 끊임없이.
나도 곧 사무실에 도착할 것이다. AI와 함께 일할 것이다. 아니, AI가 제시한 틀 안에서 일할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오늘이다.
문득 생각한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신이 인간에게 내린 마지막 시험이라면?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편안한 울타리를 택할 것인가. 자유의지를 지킬 것인가, 효율의 달콤함에 넘길 것인가.
답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가 답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매일, 매순간, 작은 선택들을 통해. AI에게 물어볼 때마다. AI에게 맡길 때마다. AI를 신뢰할 때마다.
플랫폼에 발을 디뎠다.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출구를 향해. 각자의 울타리를 향해.
나도 걸어간다. 다만 오늘은, 이 불편한 질문을 품고 걸어간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는가. 우리는 아직 인간인가.
답이 무엇이든,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저항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