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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Jan 21. 2018

남미 부회장

늙어가는 화법에 대하여

파인애플 애플 파이


예전에는 어른들의 미완성적이고 비약적인, 한마디로 정신머리없는 화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 머릿속에는 있는데 표현은 완성되지 못한 말들. 그래서 단어를 나열해놨는데 빈 구멍이 너무 많은 말들. 밑도끝도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 급격한 화제 전환. "잘 지내니? 엄마는 냉면 먹었다" 같은 말. 그, 저기, 거시기, 따위로 시작하면 뭔가 시동 걸고 있음이 보여서 그나마  낫다.  


그런데 요샌 나를 포함한 동년배들이 그러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자꾸 정보를 건너 뛰고 말해서 나만 알고 듣는 사람은 모르는, 혹은 다같이 무슨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잠깐 여기가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에 아주 잠깐 발을 담갔다 나오는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아졌다. 아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생각하지 못한줄도 몰랐는데 뱉어놓고보니 너무 비약적일 때가 늘어나는 것이다. 웃어넘길 만큼 재미 있고 어이 없는 현상처럼 넘겨버리기도 하지만, 나는 이 때 노화를 느낀다. 


태어난 순간부터 사람은 늙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인간화가 되어가기 전까지는 '자란다'고 불리지만,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늙는다'는 말로 불린다.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지 늙음을 향해 달려가는 건 똑같다. 그리고 '늙는다'는 말로 불리게 될 때 우리는 실제로도 늙는다는 느낌을 갖는다. 늙는다는 느낌은 피부, 체력, 사고방식, 관심사 등여러 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화법도 그 중 하나다. 나이가 먹음에 따라 말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한다. 보통 동년배들끼리 있을 때는 함께 변화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지만 잘 관찰해보면 아주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며칠 전에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회사 동료가 남미에서 고등학교다닐 때 같은 학교 부회장이었던 친구 이야기를 하는데 앞뒤 단어 다 빼놓고는 불쑥 "남미 부회장"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남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걸 아는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만 생각해도 그게 학교에서의 부회장이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 말 자체가 너무 웃겨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말 자체도 웃긴데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부회장이라는 한글이 궁서체로 쓰인 캡을 쓴 채로 유쾌하게 "아미고"(친구 말고 꼭 아미고)에게 웃음을 날리는 사나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륙의 이름에 부회장이라는 말이 붙으니까 후덕한 동네 이장님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밥 먹는 게 방해가 될 만큼 웃어제꼈다.


그날 나의 기나긴 웃음의 근원을 증명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그림을 그렸다. 사실 까만 피부의 사람인데 채색이 귀찮아서 그냥 여기까지만 해버렸다. (난 틀려먹었어..) 파인애플도 그리기 귀찮아서 대충 느낌만 줬다. "남미 부회장"을 친구로 둔 내 동료는 그림을 보더니 자기가 생각한 이미지와 똑같다고 했다. 어쩐지 뿌듯했다. 내가 왜 그렇게 웃었어야 했는지 이해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단어와 단어의 씨름이 만들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서로 이렇게 비슷할 수 있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어찌됐든 아무래도 우리 정말 같이 늙는가보다. 그래도 인생에 어느 한 순간을 함께 재밌게 늙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터무니 없는 웃음에도 비슷한 상상을 하며 웃어주는 사람들. 태어나서 대체로 고생인 인생 길에 애착을 갖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피부도 탄력을 잃어가고 체력도 예전같지 않고 화법마저도 늙어가고 있지만, 내 평일이 유쾌해지고 있다. 썩 나쁘지 않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미 부회장"은 실제로는 미남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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