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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Feb 01. 2018

보라카이 가지 마세요

나만 가게요

나보라카이갔다올게.jpg

올해 다짐 같은 게 있냐고 누가 물었는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워낙 계획하는 걸 싫어하고 새해라든지 무슨 기념일이라든지 그런 숫자들을 크게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 내가 사는 시간이 2017에서 2018로 바뀐다고 딱히 그런 걸 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올해에는 보라카이에 가지 않을 거야


나는 2017년에만 보라카이를 세 번 갔다왔다. 갈 때마다 한 일주일씩 있다왔는데, 문제는 두 번, 세 번 갈 때마다 약간씩 죄책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좋은 곳도 분명히 많을 텐데, 왜 나는 또 보라카이에 가고싶어지냔 말이야! 라며 억울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어쩌나. 나는 원체 특별히 좋아하는 거나 특별히 싫어하는 걸 잘 만들지 못하는 성격인데, 좋은 게 한번 생기면 불타오른다. 보라카이가 거기에 잘못 걸려들었다.


하여튼 올해에는 진짜 보라카이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반값 특가 소식에 동공이 흔들리자 마음까지 흔들렸고 이내 내 신용카드까지 흔들려버렸다. 고스톱에서 세 장이 맞으면 괜히 '흔들었다'고 하는 게 아니다. 동공, 마음, 신용카드의 흔들림이 합쳐지자 결국 나가리가 났다! 올해 나는 그렇게 또 보라카이 행 티켓을 끊었다. 이쯤되면 이 여행에서는 어디 묵을지, 태풍이 오면 어쩌지, 얼마를 가져가야 할지 1도 고민이 필요 없는 상태다.


도대체 나는 왜 그렇게 보라카이에 가는 걸까?


보라카이는 그렇게 생각만큼 천국같은 곳이 아니다. 요즘 보라카이는 마치 동북아에 위치한 휴양지 같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다. 스테이션2를 어슬렁거리다보면 이 나라가 필리핀인가, 중국인가, 한국인가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다. 복잡한 한국과 한국에서의 관계를 피해 도망쳐왔더니 또다시 어디선가 한국인의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곳은 더 이상 내가 원하는 휴양지가 아니지 않은가. 디몰 근처는 정말 사람에 트라이시클에 그룹 관광객에 난리도 아니다.


내가 처음 보라카이 땅을 밟았던 지난해 4월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세 번째로 방문했던 12월에는 칼리보 공항이 지옥처럼 변해있었다. 공항에 3시간 전에 도착했는데도 내 비행기의 체크인 라스트 콜이 나올 때까지 나는 공항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공항 직원들에게 라스트 콜임을 설명하고 들어선 공항 안도 그런 지옥이 따로 없었다. 체크인 카운터, 공항세, 이미그레이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뒤섞여서 도무지 어디가 어느 줄인지 알 수 없으며 새치기와 불평불만이 난무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나는 우연히 어떤 직원에게 100페소(약 2천원)를 팁으로 주고 공항세 지불 대행과 새치기 대행(?)을 구해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


이는 칼리보 공항이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전혀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과 중국의 칼리보행 비행기편을 무지막지하게 늘려댔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슷한 시간 대에 뜨는 한국행, 중국행 비행기가 여러 항공사에 걸쳐 여러 대가 있었는데, 공항은 구멍가게랄까. 그렇다고 까티끌랜 공항으로 가는 건 가격 면에서 이득이 전혀 없어서 딱히 좋은 옵션도 아니다.


또 시끄럽고 복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보라카이의 밤 문화는 또 어떤가. 외설적이고 아슬아슬한 불쇼, 지칠 줄 모르는 라이브 공연, 문 닫지 않는 클럽들. 크리스마스나 새해 기념으로 섬 전체가 출렁거리는 분위기. 이상하게 조악한 퍼레이드. 시끄러운 음악. 이젠 술도 끊어버려서 맥주가 싼 게 큰 메리트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은 보라카이에 나는 왜 또 가고 싶은 걸까? 왜 이런 단점들이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않는 걸까? 


그 이유는, 여기에서는 밝히지 않겠다. 나만 알고 있어야겠다는 심보이기도 하다. 단지 보라카이 여행을 고려하는 분들께서는 미리 이런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가시면 좋겠다.


그리고 혼자서 말도 안되는 꿈을 살짜쿵 꿔본다. 나 빼고 모두가 보라카이의 이 일부 나쁜 점을 크게 깨닫게 돼서 나만 홀로 보라카이에 가게 되는 평화로운 그 날을. 보라카이가 인기 여행지 목록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나만 그 섬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는 여행자가 되기를. 나 혼자 화이트비치의 아름다움을 고요히 느낄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하지만 물론 그렇게 되면 섬 경제가 흔들리고 보라카이의 내 친구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결국 보라카이를 오가는 교통수단이나 인프라가 흔들릴 테고 여러 문제들이 생기겠지. 뭐든지 어떤 사건의 한 면만을 기대하고 지지할 수 없는 게 인간 세상이다. 


뭐, 이런 딜레마에 봉착할 때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태어나서 다들 고생이다 증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보라카이를 자꾸 가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noglenim/10

https://brunch.co.kr/@noglenim/15

https://brunch.co.kr/@noglenim/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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