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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Apr 02. 2018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  

뜻밖의 생일축하

주인공은 촛불

"오른 쪽이 현준이 아빠야. 현준이 아빠가 현준이만큼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야."


어릴 적 자기 아빠의 모습과 똑같이 생긴 4세 어린이는 내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듯 했다. 아직 영글지 않은 어린 얼굴에 이 사람이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물음표가 가득해 보였다. 조카는 그래도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싶은지, 다른 질문을 던져보기 시작했다.


"어디서 찍었어?"

_어린이집에서

"어디 어린이집?"

_이거는 현준이 태어나기 전에 현준이 아빠가 아주 어렸을 때 고모랑 같이 다녔던 어린이집이야

"어디 있어?"

_저기 멀리 서울에 있어


하지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근데 이거 누구야?"


"이게 너네 아빠야"라고 천천히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해봤지만 다시금 "누구야?"라고 묻거나 어리둥절한 채로 "응?" "응?" 하다가 결국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아마 아빠에게도 어린이 시절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엔 고작 이십 몇 개월치의 생의 경험은 너무도 짧았을 것이다. 아빠는 분명 어른이고 어린이는 나뿐이며, 내가 아빠만큼 자라나버린 미래로 가는 길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조카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반복되는 문답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러고는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액자 틀에 붙어 있는 손톱만한 가짜 촛불. 아이가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촛불. 심지어 나는 그게 거기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주 작고 어쩌면 조악한 모형.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한 피곤한 도전에서 벗어나 자기가 아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한발 더 나아가 자기가 아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촛불이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조카는 박수까지 치며 전 국민이 다 아는 바로 그 노래를 신나게 끝까지 불렀다. 그 단순함이 너무도 귀엽고 예뻤다. 그 작은 하나의 모형 촛불이 이런 갑작스런 흥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구의 생일을 축하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누가 됐든 이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은 분명했다.


시간의 흐름이란 삶의 방정식을 아는 어른이 된 대가로 모르게 된 것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뻐서 치는 손뼉 소리조차도 너무 작은 아이이지만 나보다 더 큰 즐거움과 흥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조카에게서, 내가 완전히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작은 즐거움들에 대해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4세 아동의 천진함에 웃음짓는 32세의 나는 엄마 아빠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엄마 아빠가 되기까지의 인생길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을 너무도 잘 아는 어른이다. 엄마 아빠와 약 30년 이상의 시간차를 두고 다른 환경을 경험하고 있지만, 내 손으로 내 삶을 꾸리고 책임지는 것에 의무감을 느끼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매일의 피로함과 싸운다는 점에서 감히 어른의 삶을 알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대신 세상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들, 당연히 거기 있거나 없을 거라 생각해서 보지 않고 지나가는 것들의 즐거움을 모르게 된 건 아닐지. 무뎌졌거나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건 아닐지. 쓸데 없이 추억에 젖어버리는 남루한 어른 게이지만 얻어버린 건 아닐지. 내가 놓쳐온 촛불들과 잃어갈 촛불들이 벌써부터 아쉬웠다.


(그리고 어린이의 의도하지 않은 천진한 말에서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과 감상을 발견하려는 썩어버린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조금 속상했다. 어린이와 노는 시간을 줄여야겠다. 이상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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