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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May 24. 2018

끝과 시작, 죽음과 삶의 동질감

할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즈음의 일기

Photo by Kristina Tripkovic on Unsplash


끝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와 사회생활의 시작을 목전에 둔 나 사이에 있는 미신적인 연결성을 믿기 시작했다. 믿고 싶었다가 맞으려나.

부모가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한 후부터 삶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건강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젊음에 대한 환상과 뒤섞인 미련을 포기해나가기 시작했으며, 보험과 노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지도 않은 날에 대한 공포가 쌓여갔다. 나의 건강, 대학 진학, 삶의 안정성 등 무언가에 항상 목을 메어온 부모의 현실적인 모습이 보였다. 그런 종류의 촌스러움을 원망하기도 했고, 솔직하게는 경멸한 적도 있었다.

이젠 나보다 앞서 이런 경험을 했을 부모가 비로소 삶의 동반자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워 있는 할아버지와 시작하는 나 앞에서 부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할아버지는 간간이 움직였다. 처음 먼저  잡아본 손이었는데 낯설지 않았다. 할아버지 팔에 있는 멍자국이나 얇은 발목도 낯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는데 전혀 낯설지 않았다.

낯선 건 따로 있었다. 끝에 있는 할아버지와 출발선에 있는 나 사이에 있는 이상한 동질감. 정확하게는 이 사람이 죽음이 나의 생에 어떤 종류의 활력, 생의 기운을 넘겨주리라, 북돋워주리라, 하는 보이지 않는 연결성. 그 느낌이 가장 낯설었다. 그건 시작과 끝 사이의 이질감이 아니라 동질감이었다. 신앙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있는 삶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시작이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 그 중간의 '어른'들. 어른들은 사느라 바빠 죽음을 잊는다.

하지만 죽음과 삶은 분명 연결되어 있다.




이삿짐을 싸다가 발견한 일기.

나는 사느라 바빠도 죽음을 상기하며 사는 어른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순이 내 인생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는 잘 살면서 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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