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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May 30. 2018

카카오톡 이모티콘 승인 거절당했다

한국식 비즈니스 메일에 대하여

프리비어스 스토리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하여 퇴사 후 첫 번째 뻘프로젝트로 이모티콘을 만들어보았더랬다. 포토샵 활용능력과 그림그리기 기술을 향상시켜준 좋은 경험이었다. 어떤 경험이든 뭔가는 꼭 얻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하지만 알거지인 채로는 원하는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다는 호환마마같은 무서운 사실 역시 잊지 않았다. 나 지금 울고있니.

https://brunch.co.kr/@noglenim/48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한 프리비어스 스토리는 위 글에서.  



누군가는 이 거절 메일을 써야했겠지


카카오톡은 이모티콘 승인이 2주 걸린다기에, 지원했단 사실을 거의 잊은 거나 마찬가지로 지냈다. 오이도 내맘속에 묻어둔 채로 나는 퇴사 후 두 번째, 세 번째 프로젝트를 넘어 네 번째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참고로 두 번째는 포트폴리오 만들기, 세 번째는 영어로 일해보기, 네 번째는 소설쓰기이다.) 모아둔 돈도 없었기 때문에 당분간 회사 없이 사는 경험을 지속하기 위한 소소한 알바와 글쓰기 레슨으로 밥벌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2주가 지났을 때쯤,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비즈니스식 거절의 정석. 오랜만에 취준생 시절 수도 없이 받던 거절 메일을 떠올려봄


승인 거절 메일이었다. 크게 속상하거나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런 아쉬운 마음보다는 뜬금없게도, 이런 거절 메일을 썼을 누군가에게 연민이랄까 동질감이랄까 그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거절당하는 사람을 마음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거절 의사를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단어와 문단 구조를 세심하게 고르고 닦았을 메일 작성자에게. 나도 수도 없이 써봤고, 수도 없이 받아봤던 사실이되 솔직하진 못한, 솔직할 수 없는 비즈니스 메일을 작성하는 직장인들에게. 과거의 나에게.


안뇽 여러분! 고생했어염♡


사실이되 솔직할 수 없는 비즈니스 메일


'비즈니스 영어'라는 분야는 상업화된 카테고리로 존재하는데, '비즈니스 한국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우리말에도 분명 비즈니스적인 문법이 존재한다. 특히 거절할 때나 일을 떠넘길 때 등 다소 난처할 수 있는 메일의 경우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특징은 위의 이메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음과 같다.


직접적으로 난처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거나 양해를 구한다.

난처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난처함이 발생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이해와 양해를 구한다.

상대방의 노고와 공을 짚어 칭찬한다.

향후에 발생할 수도 있는 기회를 열어두는 뉘앙스를 주어 난처함을 무마시킨다.

다시 한번 감사한다.


실제로 유저들과 직접 마주하는 공지사항을 작성할 때나 비즈니스 관계에 있는 외부인들에게 이메일을 작성할 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사를 명확히 밝히되 과거부터 다져온 관계와 미래에 있을 기회를 해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국적인 겸양을 충분히 살려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돌려 이런 종류의 비즈니스 문법이 탄생한다. (일본은 더 심하다던데. 아무렴..)


유병재의 공적 언어 해석
같이 보면 좋은(?) 번역어들
회사 언어 번역 http://hooc.heraldcorp.com/view.php?ud=20151110000326
불합격 통보의 속뜻 https://www.fmkorea.com/62653889 



거절 메일에 탈탈 털리던 취준생 시절에는 사실 이런 말들이 껍데기 같다고 야속해하기만 했는데, 직접 써본 사람이 되고 나서는 이 행간에 담긴 고민들도 이해하게 된다. 물론 매번 이슈에 따라 다르게 써야 하는 비즈니스 메일과는 달리 이런 정해진 통보 메일은 한 번 쓴 걸로 계속 돌려막는 거긴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고민해서 썼고 고민해서 디자인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고, 의외로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민 같은 걸 느꼈다.


물론 실제로 검토 담당자들은 (나도 언젠간 그랬듯이) 뭐 이런 거지 같은 걸 했어, 라며 내 업무 시간을 잡아먹은 지원자를 미워했을 가능성도 있다. 뭐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기업이 잘라버린 직원은 고객이고, 고객이 혐오하는 기업은 일자리고 뭐 다 돌고 도는 거다. 세상의 모든 이면을 알 필요도 없고, 한 단면에 너무 섭섭해하거나 조바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건 그냥 저질러져버린 것이고 그냥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 다들 그저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면서 살 뿐이지.


그냥 나의 세계관인 것이다♡


이모티콘은 떨어졌어도 내 뻘짓은 계속된다


어디서 한두번 떨어져본 인생도 아니고, 어차피 큰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오이들에겐 아쉽지만 이번 기획은 결과적으론 실패였다. 누군가는 선 굵기가 너무 굵은 거 아니냐고 했고, 누군가는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서 내보면 어떠냐고 했다. 둘 다 의미 있는 조언인 것 같지만 당분간은 다른 프로젝트를 하느라 바빠서 못할 것 같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돈도 안되는데 참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여기서 프로젝트란 내 나름대로 마감을 정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 왜 이렇게 힘들게 사니, 울고 있니. 힘들지만 새삼 정말 회사를 안 다니고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저런 겸양찬(?) 메일을 쓰지 않아도 된다니... 회사에서는 나름 재미를 느끼는 일이기도 했지만 안하고 있다보니 깨닫게 된다. 일을 안 하면 더 재밌다는 사실! 하지만 물론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펼쳐진다. 0으로 수렴하는 통장 잔고 관성의 법칙. 내 돈 쓸어가는 2대 보험놈님들.


하지만 회사를 다니나 안다니나 버는 건 똑같다던 점쟁이의 말만 믿고 어쨌든 나의 뻘짓을 이어가볼 예정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 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런 오픈된 플랫폼이 있다는 건 언제나 기회가 있다는 것이기에, 나는 떨어졌지만 카카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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